(2) 신성과 신의 성품
(2) 신성과 신의 성품
베드로후서 1장 4절『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개역개정에는 신성한 성품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성(데이아스 θείας)으로 되어있다. 신성한 성품과 신성은 같은 의미인가 다른 의미인가?
신성한 성품으로 번역된 것은 영어 성경 NIV를 따라 번역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신성과 신성한 성품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신성은 신의 능력 그 자체이나, 신성한 성품은 마치 인간의 성품이나 인격을 표현하듯이 번역하므로서,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오해가 바로 베드로후서 1장 5-7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개역개정)
개역개정의 “~를 더하라” 라는 말에 대해서, 헬라어 성경은 ~주어진다 라고 표현하고 있고, 영어 NIV에는 ~make every effort to add to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개역개정에 “더하라는 표현”은 NIV처럼 노력을 하라는 의미와 같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아드려지게 만드는 것이다. NIV와 개역개정은 노력하라는 것이다. NIV와 개역개정은 헬라어 성경을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노력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처럼 목사들이 잘못 설교를 하는 것이다.
신성한 성품은 영어 성경에서 divine nature으로 신성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성품을 추가하였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고유의 신성이 바뀌어 질 수 있는 성품으로 번역되므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5-7절에서 표현한 행동을 하므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이렇게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신도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 라는 질책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너무나 충격적인 설교였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노력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라는 순간, 아! 이렇게 되면 불교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구나 라는 비탄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자기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죄로 인해서 그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부활생명을 주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부활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결과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세상에 태어난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대속의 죽음을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최초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첫사람은 죄의 몸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태어났고,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죄의 몸에 대해서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 대로” 에서 형상은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는 그들의 심령 속 성전에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죄의 몸에 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전에는 자기가 앉아있는 모양이다.
포도원(성전)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하나님)가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로 세상에 창조된 사람들의 성전에 하나님이 나가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사람 아담과 분리 된 후의 남자와 여자는 다른 존재이다. 첫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으로 바뀐 존재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을 창조하시는 내용이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첫사람(그리스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인 첫사람이 만들어졌는데, 이 형상을 따라 우리(성부와 그리스도)가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이 죄인의 모습으로 만들자는 표현이 된다. 첫사람과 남자와 여자의 형상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의 차이가 된다. 첫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심령 속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이후의 사람에게는 성전에 자기가 앉아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려주신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 있는데, 그 성전에 하나님은 없고, 자기가 우상처럼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자기의 형상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자기의 형상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육적 자아)이 그 성전에 앉아있는 것이다. 첫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자기의 형상은 옛사람으로 표현된다.
대부분 교회 신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거룩한 품성 등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타락하므로 형상이 사라졌지만, 이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으로 인해서 형상을 잊어버렸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 라고 말을 한다면 이는 영지주의에 가까운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함께 자기라는 옛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성도의 심령 속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은 성경을 인본주의 사상과 결부시키려 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에 인간의 행동과 노력을 끼우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결단해야 한다든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말들은 다 인본주의 사상인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하는 것은 다 비성경적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율법주의(계명에 얽매이게 하는 것), 영지주의 (깨달음, 노력, 자기 속의 신성을 발견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복음과 이것들을 결합시킨다면, 영적 간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성도의 마음)에 선 것을 보거든 산(성전)으로 도망치라고 했다. 성도는 복음으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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