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활생명과 부활체
(3) 부활생명과 부활체
①부활생명
요한복음 11장 25-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이라는 헬라어는 아나스타시스이며, 영어는 resurrection이다.
우리 말 부활은 이전에 없어진 법이나 제도를 다시 복원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영어 역시 제도, 유행, 혹은 슬럼프 등이 다시 힘을 얻어 회복된다는 비유적인 의미로도 널리 쓰였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미의 아나스타시스는 세상에 없는 용어로서,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이 생명이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말을 할 때, 예수님 자체가 부활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때 부활 생명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곧 생명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생명이 없는 것에서 생명이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은 죽어야 할 육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대해서 말하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영이
하나님에 대해서 죽어있었는데,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므로, 죽었던
영이 생명을 얻어서 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성경 귀절이 베드로전서 3장 18절의
말씀이다.『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오늘날 신도들은 부활에 대해서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에만 집중하므로 부활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성도에게 적용되는 성경 귀절은 로마서 6장 4-5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서 세례에 대해서 두가지를 설명하는데, 앞 부분은 부활생명으로 나가는 것이고, 뒷 부분은 세례가 예수의
죽으심과 합해지듯이 예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돠는 것이라고 한다. 부활과 같은 모양은 부활체를
의미한다. 즉 영이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문자적으로 대부분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신도들은 받아드리고 있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영적으로 새생명을 얻고, 부활의 몸도 입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혼란스럽다. 성경이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이 교리나 잘못된 설교를
들으므로, 성경의 말씀을 정확하게 믿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게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② 부활체
요한복음 20장 24-25절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지만, 자명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 무덤에 묻힌 죽은 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도마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한복음 20장 26-27절에서『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ἴδετε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καὶ τοὺς πόδας μου ὅτι ἐγώ εἰμι 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
위의 헬라어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분, ἴδετε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καὶ τοὺς πόδας μου ὅτι ἐγώ εἰμι
번역하면,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이다. 올바른 번역이다.
둘째 부분, 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
개역개정에는 αὐτός·(그: 삼인칭 단수)가 번역이 되지 않았다. 그는 도마를 의미한다. 삼인칭
단수가 번역되지 않으므로, 개역 개정이 명령형으로 바뀌었다. 원래대로
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를 번역하면, 만져 보라가 아니라 그는 나를 만졌다 이다.
그 다음에 오는 문장이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
이 문장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와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이다.
그런데,
개역개정은 καὶ ἴδετε와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로 나누었다.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의 부분에서 πνεῦμα(영)와 σάρκα(몸)를 분리시키고,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살과 뼈)를 하나의 묶음으로 만든 것이다.
원래 영의 몸으로 되어야 할 것을, 영이 살과 뼈가 없다는 식으로 된 것이다.
καὶ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이다. ἴδετε는 보다 라는 의미를 가진
명령형 2인칭 복수이다. (너희들) 보라는 것이다. ὅτι는 접속사이다. πνεῦμα(영) σάρκα(몸) “영이 몸을 가지고 있음을 만져보라” 즉 영의 몸을 만져보라는
것이다. 접속사는 영이 몸을 가지고 있음과 보라는 것을 연결시킨다.
그 다음 문장에서, καὶ(그리고) ὀστέα(뼈들) οὐκ(않다) ἔχει(가지지) καθὼς(~하듯이) ἐμὲ(나를) θεωρεῖτε(네가 보다) ἔχοντα(현재 진행형: having)
번역해 보면, “그리고 너희들이 보다시피
뼈들은 없지 않은가” 라는 것이다.
전체를 다시 번역해 보면,“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그는 나를 만졌다. 너희들이 영의 몸을 만져 보라 그리고 보다시피 뼈들은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만져보라는 대상이 영의 몸인지, 아니면 살과 뼈인지가 쟁점이다. 개역개정은 뼈에 초점을 두므로,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영의 몸일
경우에는 뼈가 없는 영의 몸으로서 하늘로부터 태어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뼈들을 가지지 않은 영의 몸은 변신이 가능한 몸이다. 예수님은 벽을 뚫고 들어오셨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와
만날 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두 제자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도마가 본 것은 예수님의 죽은 상태에서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아니라, 그 자국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마와 같이 제자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뼈가 없는 영의 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마치 예수님이 살이 있고 뼈가 있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갔구나 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개역개정은 이전의 뼈가 있고 살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벽을 뚫고 들어오시는 몸을
설명하는 것은 상호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몸은 육의 몸이 아니라 영의 몸(πνεῦμα
σάρκα 프뉴마 사르카)이다.
그리고 육체의 뼈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뼈가 필요하듯이
그런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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