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이다.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다 구원을 찾는 사람들인데, 좁은 문은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다는 말이다. 구원을 찾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알 수 없다.   세례를 받는 것은 노아의 방주 때에 물로 심판하는 물을 상징한다. 왜 물로 심판하시는 것을 나타내셨는가? 노아가 120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외쳤지만 그것을 받아드린 사람은 없었다. 120년 동안 외쳤는데도 노아의 가족 7명 외에는 아무도 복음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 참 놀랍다. 그래서 주님이 방주를 만들도록 말씀하셨다. 히브리 백성이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본지 딱 1년 지났는데, 광야에서 매일 맛나를 먹는 기적의 경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약속의 땅을 주신다고 정탐꾼을 보냈는데, 두 정탐꾼은 주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라고 말했고, 열명은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했는데, 육십 만명이 의견이 갈라지지 않고 다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에 대한 선언이다. 우리 힘으로는 열 정탐꾼의 말이 맞는지 두 정탐꾼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으면 넓은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어려운 길을 택해야 하는구나』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노아 때 살았더라면 우리도 노아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상태가 지금 어떠한지 이것을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구약성경에서는 노아의 홍수와 광야에서 가나안을 앞두고 선택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깨닫기를 바라는 뜻에서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한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주님이 원하는 길을 택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창세기 32장 26절에서『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홀로 남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게된 이야기이다. 우리가 죽음처럼 홀로 주 앞에 서는 예배가 있을 때 주님은 만나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 홀로 서는 날이 와야한다. 창세기 32장에서 그 때 주님은 어떤 사람을 보내셨다. 그래서 야곱과 씨름을 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바로 역사일 것이다. 바로 씨름을 하는 것이다. 야곱이 홀로 남게된 이유는 창세기 31장 3절에서『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20년 동안 라반 집에서 나그네처럼 광야 생활을 했다. 자기가 거할 땅이 아닌 곳에서 거의 20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20년 만에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그래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야곱이 얍복강까지 왔지만, 건너가면 그 조상의 땅인데,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남았다. 32장 1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말했다.『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라 그래서 동네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사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7절에서『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 반응하고 있다. 에서를 만나기 전에도 에서에게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육신이라는 것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안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에 속한 지식과 영생의 소망

디도서 1장 1절에서『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자기의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신 것이다. 천사가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전도로 이 땅에 나타내시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천국가는 줄로 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중심이 된다. 자기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 전체가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이 등불을 켰는데도,『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등불을 켰는데도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누가복음 13장에서『주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제자가 질문을 했더니『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라고 하셨다. 열고 대강 가는 것이 아니라『힘써라』고 했다.『그 날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주님이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라는 성경의 말씀이 생각난다.『내가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과 상치되는 말씀이다. 등불을 켰다고 신부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내가 믿는다』라고 해도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도무지 모른다』라고 하실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등불을 켰고, 넓은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성경에서 좋게 보이는 말씀은 대개 끝에 쓰여져 있다.『내가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많은 교회는 이런 말씀을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그러니까 잘못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내용부터 교회에서 설명하면 이런 잘못된 믿음이 시작될리가 없다. 그런데 믿음이 쉬워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6-8절에『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보면 죽을 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없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볼 수 있듯이 주님이 육체 안에 오셨다. 육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육체 때문에 볼 수 있다. 주님이 육체를 입고 오시지 않으시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형상이시다. 우리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인생의 풍랑 앞에서 주님은『그래 그 풍랑을 해결할 수 있는 나야』라고 계시할 수 있지만, 또한『그 풍랑을 내가 준 것이야』라고도 계시할 수 있다.『이 풍랑을 통해서 전심으로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원해』라고 말이다. 그런데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주님이 있다. 그것이 자기를 비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기에는 이견이 없다. 거기는 언제나 항상 볼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 나의 풍랑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님 앞에 서있는가? 아니면『내 인생의 풍랑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구나 내가 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구나』라는 주님 앞에 서있는가? 하나는 주님이 내 편에서 풍랑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주님이고, 또 하나는 풍랑 속에 서 계시는 주님이시다. 욥기에서 욥은『왜 이런 어려움이 내게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점점 욥은 깨닫게 된다.『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인생의 고통 속에서 함께 하시는구나 주님이 내 쪽이 아니라 내 반대 편에 서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알게된다. 주님이 욥에게 주신 것은 회개였다. 욥은 ...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디도서 1장 1-3절『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세가지를 위함이었는데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의의 말씀을 전파할 때『방주 바깥에는 다 심판을 받는다』라고 전했다. 방주 바깥에는 하나님의 의가 적용되고, 방주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적용된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는 하나님에게는 의가 되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의가 반드시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기 아들이 제물로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만큼 주님의 의가 나타난 곳이다. 노아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심판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그리고 방주를 만들었다. 방주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심판하신다는 것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방주가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죄가 없으신 자기 아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은 것 그 만큼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이 믿어진다. 십자가에 대한 회개없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없다.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 믿는다는 것은 거짓 복음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모든 사람들이 각기 제 길로 갔거늘』라고 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 자체가 주님이 진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는 믿음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두려운 것...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다서 1장 3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다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편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common salvation 이라고 한다. Common 이라는 말은 사도행전에『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모든 사람이 함께 서로 물건을 통용한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구원을 말한다. 구원이 우편 강도처럼 쉬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빌립보 간수처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십자가 상의 위기 상황이나 언제 어디서나 구원은 동일하다. 성경에서 어떤 경우는 구원이 쉬워 보이지만 구원을 모르는 것이다.  common salvation 에 대하여 편지를 쓰는 이유가 성도에게 단 번에 전달된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 시대 많은 교회는 내가 예수를 안믿다가 들어보니 설득이 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의로우신 자의 피 외에는 우리 죄는 우리 선행으로 씻어지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안믿다가 믿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회개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들어갈 곳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번에 전달된 믿음이라고 한다. 여기에다가 단번에 영원히 전달된 믿음이라고도 한다.『죄인인 우리가 진지하게 예수를 믿게되면 다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다서는 그런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힘써 싸우라』고 말한다.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달된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서에서는『믿기만 하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믿는 자는 주의 영광을 본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3장 24절에서『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대개 교회를 나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오자마자『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해서『네 모든 죄를 고백하고』라는 말을 넣기도 한다. 그 때 인용되는 구절이 로마서 4장 3절이다.『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서를 보면서 죄를 짓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풍랑의 주님을 보고 다 같이『유령이다』하고 소리질렀지만 베드로는 떨리지만『만일 당신이 주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게하소서』라고 하고 배를 나와 물 위를 걸었다. 베드로는『이성과 경험을 뛰어 넘는 믿음이 있구나』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이런 믿음을 본받기를 원한다. 복음서에는『믿는 자에게는 당치않는 일이 없으리라』그리고『두려워 말고 믿으라, 믿는 자는 주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하는 귀절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기적과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4장 18-22절에서『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에 죽은 것과 사라의 태에 죽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로마서 4장 3절과 18절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되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믿는 믿음과 주님이 주는 믿음 사이에는 괴리가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로마서 4장 3절을 믿고 살 때 환경 속에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지만, 내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