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태복음 1장 21-22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예수』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호와이시다. 히브리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고유명사를 엘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글로 표현할 때 그 부분을 공란으로 두었으며, 히브리 사람들이 말할 때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창세기 4장 26절에서(요드 바브 헤 바브) 라고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모세에게 밝혔는데, (마소라 성경: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영어: I am who  am) 라고 하셨다. 히브리인들이 이 이름을 『아도나이』라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기록된 구약성경에는 공란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명으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서 지파별로 6명씩 차출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72일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70인역이라고 하는데, 공란으로 되어있던 하나님의 이름을 YHWH로 표기하고 큐리어스(Kurius)라고 불렀다. 라틴어로는 도미너스(Dominus)라고 한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들이 YHWH에 adonai의 모음 a, ai를 붙여 YHaWHai로 전환해서 야훼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후 번역 과정에서 YHWH 부분을 영어로 Jehovah로 표기했다.(미국표준) 오늘날 미국 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The LORD 로 번역 표기하고 있다. 영국에서 번역한 King James Version도 The LORD 로 되어있다.  한글성경(개역개정)에는 The LORD가『여호와, 주』라고 혼재 되어있다. 창세기 4장 26절, 시편 110편 1절 등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 34절 등에는『...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이사야 55장 6-11절『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들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버리면 하나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을 구원하셨으니, 인간도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순종을 원하신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노력하여 사는 것을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성경 속에 어떤 말씀이 있으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묻고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의 노력과 헌신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므로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된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열두 정탐꾼 ...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보낸 이유

창세기 8장 1-6절『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사십일을 지나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끝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궁창위의 물을 아래로 쏟아버리고, 다시 그 물이 되돌아갔다는 의미다. 궁창 위의 물이 다시 돌아가고 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던 그 때처럼 궁창 아래의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된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보낸 것이다. 창세기 8장 7-10절에서『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내 놓으매』를 히브리어로『샬라흐』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으로부터 세상에 내보내는 것도『샬라흐』다. 창세기 3장 23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즉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으로 쫒겨났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여기서『보내신』 이라는 헬라어는『펜포』라는 단어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궁창 아래의 물(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율법)에는 ...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17절『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다. 처음부터 빛과 어둠을 등장시킨다. 이 세상의 어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빛되심을 대비시킨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빛의 능력으로 어둠이 물러가는 그런 모습을 그려낸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그리고 1장 9-12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그러나 사람들은 3장 19절에서『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과 어둠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창세기1장 3절에서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은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어둠이 없는 빛이다. 요한1서 1장 5절『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백마타고 오시는 주님

(요한계시록 19장 11-13절)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을 기록한 서신이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환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모든 악을 이기신 부활 사건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다.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살아가던 AD. 90년대에,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반대로 미혹과 협박을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손해 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환상, 즉 현재 일에 대한 환상이다. 이 환상에는 경고와 격려가 혼재되어 있다. 세 번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최종적 구원과 심판에 대한 환상이다. 이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이미 이루어진 과거가 된 환상도 있다. 예를 들면 바벨론인 로마의 패망과 심판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환상이 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잔존하는 모든 악을 소멸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일은 아직도 미래의 일이다.  19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환상이다. 19장에는 크게 두 종류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환상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결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사건은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치 혼인잔치와 같은 일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된다. 한 부류는 장엄하고 흥겨운 노랫소리...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장 1-3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11장까지는 복음의 내용, 즉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교리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12장부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즉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 대원칙이 있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중 네 가지 기본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서로와의 관계, 원수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육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육의 마음을 부인하고 영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13장에서 바울은 더하여 세 가지 관계 즉 국가와의 관계, 율법과의 관계, 주의 재림의 날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바울은 먼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명령을 말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권세들은 권력을 잡은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한다. 복종한다는 말은 반드시 그 아래에 거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위에 있는 자를 위에 있는 자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도 질서를 따라야 하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도 깨달아야만 ...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창세기 2장 21-24절『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하나였다. 아담이 하와가 분리되기 전에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아담은 남자로 태어났는데, 여자인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분리되기 전의 사람은 완전한 하나가 된 존재라는 것이다. 분리된 이후에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사람)과 하와가 분리된 아담(남자)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이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다.『이러므로』는 원래는 하나였으므로, 한 몸을 다시 이루라는 것이다. 남자가 된 아담은 죄를 짊어지고 이 땅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리고 여자는 그리스도를 떠나 스스로 자기의 의를 이루어보려는 하나님을 떠난 영들이다.  이 말은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도 언급된다.『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여기에서 사람은 남자를 의미한다. 번역을 남자로 했어야 했다. 영어 성경에서 사람과 남자를 man으로 혼용하므로 번역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교회는 아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남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아내라는 표현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모든 영들이 들어오고, 마지막 아담 안에서 택한 영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 아담은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