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브리서 8장 6-13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언약은 옛언약과는 다르다. 예레미야가『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리라』라고 하고, 다시『베벨론으로 부터 돌아오리라』라고 말했다. 이게 새언약이다. 바벨론에서 끌려갔다가 돌아올 때는 용서받았다고 표현하지 않고 놓임받았다고 표현되었다. 포로된 자가 놓임을 받은 것이다. 포로는 죄로 인한 포로다. 주기도문에서『시험에 들지않게 해 주시고』라는 표현이 있다. 시험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가 광야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부터는『놓임받았다』라는 말로 등장한다. 다니엘이『70년 이후에 놓임을 받으리라』라고 예언했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서『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히브리서 8장 1-5절)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8장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핍박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계속해서 변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새로운 대제사장의 사역을 완전하게 행하시는 분, 옛 언약과 비교해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심을 선언한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 하늘의 성소에서 섬기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은 구약백성들처럼 더 이상 그림자를 통한 것이 아니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들은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와 같은 역할을 대신할 자격도, 능력도 없었다. 예수님은 하늘의 성소에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셔서 위엄과 권세를 누리고자 하심이 아니라 성도를 위한 중보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 섬기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여 되돌아가지 말고 굳건히 서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안다면 성도들 역시 영적 여정을 방해하고 삶을 무너뜨리는 온갖 죄와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유혹의 세상을 거스르는 걸음을 걸을 수 있다. 성도에게는 중보자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중...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7장 12-28절)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구약의 제사는 한 사람의 죄에 대해 한 번의 제물이 필요했다. 대제사장도 속죄일에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려야했다. 그 역시 불안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히브리서 7장 1-1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는 히브리서를 제외하고 창세기 14장에서 한번, 시편 110편에 한번, 모두 두 번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성경의 인물을 소개할 때 선조들의 이름과 더불어 설명되어지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창세기 14장에 멜기세덱 이야기가 나올 때는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본문3절에서도 멜기세덱은 부모가 없고, 족보도 없고, 그의 출생에 대한 설명도 없다. 멜기세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믿음의 아버지이며, ...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히브리서 6장 13-2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거듭남은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주신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히는 삶을 갈 뿐인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죄악과 싸워 피흘려 승리하는 길이다. 육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 말씀 앞에서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산다고 하는데, 그들은『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했다. 아낙자손과 싸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시작도 해 보지 않고, 주저 앉아버린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도는『로고스』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도를 다시 닦지 말라고 하신다. 닦지 말라고 하시는 내용이『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의 회개, 신앙과 세례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심판에 대한 교훈들』이다. 왜냐하면『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는 것이다. 초보의 수준에 머물지 말고, 교사가 되는 수준에 이를 때에 처음 가졌던 믿음을 ...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히브리서 6장 1-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가 살아가는 터전은 결코 진공상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구별된 수도원에서가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서 지속된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박는 도시 안에서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마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른 가치,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야하니, 세상의 흐름에 가벼이 몸을 띄우고 살아갈 때와는 다른 수고가 동반된다. 이러한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한다. 본문은 땅의 경우를 예로들어 성숙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땅...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히브리서 5장 11-14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텐데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처럼 되어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닌지 오래되고, 성경 공부도 많이 하고 해서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초보와 같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영에 대해서도 모르므로 초보인 것이다.  성경말씀의 바탕 위에서 믿음을 견고히 하지 않으면 싸우는 자가 되지 못한다. 믿을 수 없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고 나가는 것이 싸우는 것이 된다. 히브리서의 구원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싸움이 시작된다. 싸워보지도 않고『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한 열 정탐꾼과 그들의 말을 믿고 통곡한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하나님은 들어가면 땅을 주신다고 말하고, 백성들은 아낙자손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영적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오직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 만 붙잡았다. 그런데 교회 안에 앉아 있다고 모두가 휴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휴거는 거듭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