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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욥기 19장 23-25절 『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을 고난의 상징처럼 알고 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는 자였는데, 사단이 그를 송사했다. 사단은 믿는 우리도 송사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단에게『그러면 욥을 쳐라』고 허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재물이 다 날라가고, 자식이 죽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욥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부인은 욥의 신앙을 비웃게 된다.『차라리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그리고 몸에는 병이 나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욥의 친구들이 와서 처음에는 그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이 마르면서 비판으로 바뀌게 된다. 욥의 친구는『이유없는 어려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너에게 죄가 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죄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오늘날 죄 때문에 어려움이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경에는 죄를 계속 짓지만 세상에서 잘 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욥은 그렇게 응답하는 것이다. 하박국에서 말씀하고 있다. 1장에서는 악인이 의인을 둘러쌌는데, 왜 주님은 잠잠하시는가? 나는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왜 주님은 잠잠하시는가? 라고 말한다. 2장에서는 주님이 기다리라고 하신다. 그가 주님 앞에 기다리는데,『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신다.『아 주님이 심판하시는구나』마지막에는 오직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이다. 3장에서는 찬양하게 된다. 무화과 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어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 믿음을 욥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욥이 처음에 이런 믿음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는 불의하지도 않았지만,『자기 의』에 빠져있었다. 결국 많은 고통의 결과는『자기 의』에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갈라디아서 3장 22절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은 먼저 죄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책이 아니라,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 때문이다. 약속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하나님은 두 번에 걸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첫번째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횃불 약속을 말한다. 짐승을 쪼개어 그 사이로 하나님의 불이 지나갔다. 아브라함에게는『지나가라』는 말씀이 없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언약은 (히브리어:베리트)『쪼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이렇게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언약을 지키겠다』고 하신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두번째 언약은 할례의 언약이다.『내가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다. 할례는『아브라함에게 행하라』고 하신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아브라함을 초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일방적인 언약이다. 많은 사람들이왕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서 길에 나가 아무나 잔치에 데려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두번째 언약과 같은 쌍방간에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구원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서는『일방적인 언약이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한다』고 가르치는 실정이다.『믿는다고 하는 자』가 죽음의 언약에 참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믿고 있다. 오늘날에는 두가지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사실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고 눈물 흘리지만 대부분『자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이 없이 예수님이 내...

예수가 주인인가 마귀가 주인인가

갈라디아서 3장 27-29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만 된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와서『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그런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8장 39절에서 유대인들은『자신들의 아버지를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전혀 의심없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라』찬양하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말씀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헛되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다. 요한복음 13장 36-38절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서도잘 이해할 수 있다.『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

거듭나지 않으면 마귀에게서 난 자다

요한복음 8장 31-34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나왔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거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믿어서 나온 그런 『유대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제자되는 믿음』은 서로 다르다.『진리가 자유케하는 믿음』은 제자되는 믿음이다.『진리가 자유케하는 믿음』을 가질 때 구원받는다. 유대인들이 말하기를『종이 된 적이 없는데, 자유하라고 하느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라』고 하셨다. 오늘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면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용서받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죄의 종인가? 아니면 죄로부터 벗어났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죄를 씻기』를 원하고 예수님은『사람들이 죄의 종으로 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들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와 연합된 자에게 죄의 종으로 부터 벗어나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죄를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 사람들은 죄로 부터 벗어나지 않고, 오직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으려고만 하는 것이다. 죄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죄 용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옛사람(혼)이 죽는 것에 있다. 옛사람이 죽어야만, 하나님이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 처럼 부활 생명이 들어와서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거듭남이 없...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장 21-26절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말하기를『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실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다시 살리라』라고 했는데, 마르다는『다시 사는 것』을 현재적이 아닌, 육이 죽은 후 미래 마지막 날 부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현재적이다. 죄에 대해서도『언젠가 내 죄가 사하심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현재적인 죄의 사하심이다. 믿음은 지금이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나는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야, 나를 믿는 자는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육의 관점에서 보면『나를 믿는 자는 육이 죽지만 언젠가 살아나고, 육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문장의 구조가 대단히 어색하다. 성경의 말씀은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육의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믿음이 중요하다. 주님이『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하다. 요한복음 5장 24-25절에서『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이 말씀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현재적인 말씀...

십자가로 들어 와야만 구원받는다

갈라디아서 3장 26-27절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많은 교회에서 26절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즐겨 사용하지만, 처음 교회 나온 사람에게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한다면, 처음 교회 나온 사람에게는 믿음의 의미를 모른채『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믿음을 잃어버리면 천국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믿으려고 애쓰다가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3장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와 합한 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십자가에서『자기』라는 주체를 부인해야만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게된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믿음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자기』부인도 없으면서 내가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 아래 매인바 되는 것이다. 3장 25절에서 말하는 바『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이 믿음은 온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믿겠다고 결심한 그런 믿음과 다른 믿음이다. 믿음이 오는 것에 대해서 3장 23절에서도 말하고 있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사도바울이 세례 앞에 이 믿음을 두 번이나 설명하고 있다. 율법 아래 매여있으면『오는 믿음』이 없다. 오는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믿음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믿기로 결단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믿으려고 하면서 성경 공부도 하고, 새벽기도도 나가고 예배도 빠지지 않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장 1-3절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은 철학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철학이나 심리학 등 세상의 것을 넣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사도바울은 헬라 문화가 만연한 곳에서 사람의 지혜로 전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다. 십자가의 도는 자기 부인의 길이다. 십자가의 도에는 생명이 역사한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지만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다. 이삭은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을 말한다. 육체로 난 자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자를 말한다.『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나는 그리스도에게라』라고 파당하는 자마다 육으로 난 자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당 짓는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자는 십자가의 도를 가는 자다.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에 연합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만 한다. 그래야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그 믿음은 부활의 믿음이다. 부활생명이 죽은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것 처럼 회개한 자를 새 생명으로 살리신다는 말이다. 회개하는 자는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뿐이다. 구원의 시작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내가 내 자신을 못박을 수 없다. 십자가에 죽는 것은『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것이고, 그 희생을 참아내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내가 결단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혈과 육은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이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장 26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구원은『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이『방주 안』과 같은 것이다. 그 안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사람들이『예수를 믿겠습니다』라고 결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가 구원이다. 3장 27절에서 말하는 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 믿음 만이 구원받는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자아가 죽는 것이 회개다. 왜냐하면 합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을 말한다. 가롯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지만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잘못된 것을 깨달았지만 예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돈을 돌려주고 자살하고 말았다. 회개는 예수께로 돌아와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을 쫒겨난 다음에 입은『가죽옷』을 가리킨다. 가죽옷은 그 어린양이 죽어야만 만들어지는 옷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자들이다. 이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을 자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십자가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연합해 주신다. 그래서 이 믿음을 선물이라고 한다. 회개는 선물이 아니라 자아가 죽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주님이 라오다게아 교회에『너희가 미지근하므로 내가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시므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에베소서 1장 7-10절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끌려가서 살았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 주님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일으키기를 원하셨다. 다윗은 도망다니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도록 하시는 것을 알았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연합된 자를 통해서 뜻의 비밀은 알려주셨다. 이 땅에서 세상적으로는 실패하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는 은혜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오직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이 다가올 때 깨달으면 늦을 수 있다. 주님의 뜻의 비밀을 깨닫는 자가 성공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뜻의 비밀을 따라서 기쁘심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기쁘심을 따라 때가 찬 경륜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노아 때는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5년(여호수아서 등에서 언급하는 야살의 책을 근거로 함)동안 방주를 만들어서 가족 7명과 짐승들을 태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 만이 주님의 비밀이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삶을 살더라도, 주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쓰임 받는다면 이 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영향력이 없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아는 자가 위대한 것이다. 이제는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노아가 120년간 심판을 외친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해 쓰임 받는 자만이 깨달아질 것이다. ...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시편 90편 9-12절 『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내용은 모세의 기도다. 전 생애에 걸쳐서『주의 노여움과 두려움을 깨달아라』는 말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복음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 의를 얻을 때 사랑의 하나님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의를 얻기 전에는 노여움의 하나님이시다. 의와 사랑으로 계시되는 곳은 오직 십자가다. 십자가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의다. 그래서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신다. 모든 인간들의 죄에 대한 대가가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데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래서 회개하고 십자가의 죽음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이미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다. 어린양의 피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를 보면 넘어가시는 것이다. 애굽의 모든 집에는 장자가 다 죽는 진노가 임했지만 어린양의 피를 집 밖 문설주에 칠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자녀가 악을 행할 때 진노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는가? 부모의 진노를 가라앉게 하는 것은 자녀가 회개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자녀가 악을 계속 행하면서 부모에게 악을 행한 일을 고백한다고 부모의 진노가 그치겠는가? 자녀가 말하기를『육체의 죄성 때문에 어떻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저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고백할 테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한다고 부모의 노여움이 그치겠는가? ...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10절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통일된다』는 헬라어는 네 단어의 합성어다.『gether, together, in, one』하늘에 있는 곳과 땅에 있는 곳이 하나가 되어 함께 모여있는 곳이다. 이게 구약시대 가나안이요 신약에서의 교회다. 교회는 하나가 되는 곳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릴 것이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교회는 참 성도가 모이는 곳이다. 하나님이『두 세명이 모이는 그 곳에 함께 하신다』고 했다.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 성도가 함께 하는 그 곳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참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속량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들어가는 곳이 가나안이요 교회다. 거듭난 자만이 교회의 성도라고 할 수 있다.『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느니라』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앞 절1장 8절에서는『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했다. 속량(구속)이 죄 사하심이다. 구속이 있어야 죄 사하심을 받는다. 피값을 지불하고 사단의 지배로 부터 예수의 지배로 들어오는 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예수의 지배로 들어오면 예수님이 회개한 자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다. 예수의 지배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회개해야만 한다. 예수의 지배는 예수님이 회개한 자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속량은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될 때, 그 분은 그리스도가 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는데,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다. 헬라어 원문에는『주』라는 말이 없다.『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에베소서 2장 1-3절 『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쫒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들을 하여』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 하나님이 노아의 물 심판 때 인간들을 향해서『사람의 생각이 어릴 때부터 악하다』고 선언하셨다. 인간 속에 죄의 뿌리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뿌리는『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2장 2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쫒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회개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이런 상태라는 말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풍속을 쫒고 있으면 불순종의 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불순종의 영이 바로 사단이요 마귀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고 하면서도 마귀의 생각을 따르고 있으니,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세상 풍속을 따르는 자들은 영적 간음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가정이나 집에서 매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면서도 세상 풍속을 따르고 있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과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세상의 풍속을 바라보는 생각은 혼이다. 세상의 풍속을 통해서 육적인 것이 너무 좋게 생각되는 것이다. 세상의 풍속은 사단이 주는 것임에도 육적인 생각은 좋게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그럼에도 세상을 사랑하면 이런 사람의 믿음은 주님께『거짓』...

지적인 동의와 다른 믿음

요한복음 20장 31절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 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도마에게 보이시고 하신 말씀이다. 도마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도마가 없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보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 부활을 안보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죽었다가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믿는 것인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해 주었는데도 믿지 않았는데, 오늘날 목격한 자도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말하는가? 지적인 동의는 믿음이 아니다. 죄를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성경을 암송하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어도 지적인 동의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 지적인 동의는 육체가 믿기 때문이다. 육체 속에서는 구원받는 믿음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 요한복음 5장에서『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들이다. 회개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이 죽어있어서 『자기』라고 생각하는 혼으로 사는 것이다. 혼을『지정의』라고 한다. 『지정의』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대로 지었다는 형상은 영이다. 혼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영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영이 죽어버렸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숨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주셨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지만, 영이 죽으면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피하고 싶은 자는 바로 혼이다. 누가 육체의 주인인가가 중요하다. 영이 살기 위해서는 항상 어린양의 가죽옷을 입고 있어야만 한다. 육체가 죽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디도서 1장 1-2절 『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인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한 것인데』 여기서 세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요즘은『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말한다.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가? 베드로후서 1장 9절『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장 9절 앞에는 일곱 가지 덕목에 대해서 말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다. 사랑을 마지막에 언급했다.『아가페』라는 사랑은 그냥 안 생긴다. 아가페라는 것은 인간 속에 없다. 이것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회개하는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쌓여서 맨 마지막에 아가페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은 요한1서에 가서 두번 나온다. 요한복음에는『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고 했지만『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렇게 명제를 말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에서『이 처럼』사랑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이 처럼』 사랑하시니까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믿음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은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임금과 같다』고 했다. 아들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인데, 이 잔치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것이다. 3절에서『그 종들을 보내어 청함 사람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에베소서 2장 8절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이 말씀은 회개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와 회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자에게 적용하면 곤란하다. 사도바울이 죽기 얼마 전에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에게『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믿음』을 전했다.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도『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강조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고문를 당하고도 감옥에서 예배했다. 예배는 능력을 나타낸다. 예배는 창조의 회복이다. 그런데 그 때 옥문이 열렸는데, 도망하기 않았다. 빌립보 간수는 잠을 깨서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당연히 사람들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네 몸을 헤치지 말라』라고 했다. 간수는 심히 떨며 엎드려 절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다. 그 때 바울이 말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빌립보간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이 말을 전한 것이다. 단순히『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말을 전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회개가 빠져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된 것이다. 신구약 전체의 말씀 중 회개가 빠지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에베소 교회에 말한 믿음은『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얻어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이 택하셔서 믿는 믿음이다. 부르심을 얻어서 믿는 믿음은 육이 믿는 믿음이지만 택하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라는 말이다. 이 두 믿음이 만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는 회개가 있어야만 한다. 내가 믿기로 하여 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마가복음 16장 16-18절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다 예수믿고 세례받아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귀신을 쫒아내고 방언하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씀을 붙잡는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간수처럼『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그리고 사도행전 8장 13절에서『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마술장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마가복음 16장과 비슷한 말씀이다. 그런데 그는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 그랬더니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드려서 자기도 다른 사람을 안수하면 동일한 일이 일어나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8장 21-23절에서 베드로가『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게 되었는가?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베드로가 시몬에게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다.『악독이 가득하다』라는 말은『충만하다』라는 표현이다.『네 속에는 악함 밖에 없다』는 말이다. 8장 24절에서 시몬이 반응한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시몬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회개 기도하라』고 했는데, 시몬은 베드로에게 기도해 달라고 했다. 회개는 자기 자신 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구원에 대해서 성경 말씀보다는 자기가 말하고 싶...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1-27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하니,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르다의 다음 반응은 현재의 부활이 아니라 미래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성경지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본다. 즉 지금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아에게는 성경지식이 교리적으로 죽은 지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지금 부활을 믿는냐』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지금 믿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대답은 미래의 부활에 대한 성경지식이다. 현재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현재의 믿음이 없는데, 미래의 믿음이 받아들여지겠는가? 믿음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는 나를 믿는 자는 비록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그래서 영이 살게되어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이 살아서 믿어야지 구원을 받는다. 죽은 자가 아무리 믿는다고 외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영접하는 자는 영이 죽은 자가 아니라 영이 살아난 자를 말한다. 영이 살아있어야 하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장 2절 『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바울은『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씻으려고만 한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만 구원이 시작된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과 씻는 것의 차이는 죄에 대한 주체가 죽는가 아니면, 그냥 살아 있으면서 깨끗게 하는 것인가의 차이일 것이다. 죽지 않으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죄를 짓는 주체가 살아있으면서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됨을 믿는다고 한다면,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죄를 짓고 죄를 용서받으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한1서 3장 8절에서『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라고 했다. 요한복음 8장 11절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에게『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시니라』에베소서 4장 26절에서도『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죄를 짓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계속 죄를 짓고 용서받으려고 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이 되었다. 그 이유는『자기』라는 존재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를 계속 짓고 주님의 피로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자는 결국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는『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귀는 택하신 자도 미혹하려고 한다. 구원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허물은 세상죄를 말하며 죄는 원죄를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는 열심히 사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6장 2절의『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