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3의 게시물 표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장 31-35절)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이『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다.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 저런 짓을 한다고 소문을 냈다. 이 소문이 온 지방에 퍼져나가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까지 듣게 되었다.  예수님의 가족들 역시 예수님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자식을, 우리 형님을 저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붙들러 온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다. 하나님이 구약의 율법에서『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 공경하지 않으면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요 부모라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 나라에서 지체였던 자가 하나님 나라를 벗어나 이 세상에 있는데, 다시 영적 지체가 된 자가 참 형제요, 부모라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를 말한다.『믿는다』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하나가 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영의 몸으로 거듭난 자들 간에는 형제가 되는 것이며, 영적으로 하나님 만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가복음 3장 7-30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마가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안식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쉬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세기 1장 1절에『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는 안식 그 자체이다. 모든 세상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 즉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안식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안식이다.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안식을 쉰다 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또 일해야 하는 날이 오지만 하나님 나라 안식에 들어가면 일하고 쉬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천지창조를 하기 전에는 안식이었는데, 천지창조를 하게 되므로 안식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천지창조를 다 끝내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손을 떼시고 안식을 하신 것이다.  창세기 2장 1-3절에서『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안식하시니라』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안식과 같은 것이다. 천지창조에서 말하는 안식은 이 세상에서 창조의 일이 끝나는 멈춤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 라는 말은 세상에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날은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날이다. 하나님이 물질세계 속에서 이 날을 복을 주신 것은 물질적 복이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마가복음 2장 23-28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쉬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세기 1장 1절에『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는 안식 그 자체다. 성경(요한계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는 자가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안식을『쉰다』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또 일해야 하는 날이 오지만, 하나님 나라 안식에 들어가면 일하고 쉬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4장 8-10절에서『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그런즉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것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자이다. 참 안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참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참 안식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마태복음 12장 1-2절에서『때에 예수께서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장 13-22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예수님이세리인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라고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오면 먼저 자기들에게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장 1-12절)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병을 고치러 왔는데,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야이셨다. 그들은 오랜기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에 ...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마가복음 1장 29-31절『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병이 든다. 성경은 육체의 질병을 통해서, 『너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귀신들린 자들이며, 병든 자들이다. 이렇게 병든 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영적인 병을 치유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를 가진 자들은 육체로 인해 병이 들듯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므로 영이 죽어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14-17절에서의 병든 자는 육체적 질병을 통해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1장 32-34절『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말씀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쳤다는 것은 병자가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낼 것이고 병을 고칠 것을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귀신들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를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체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 애굽은 세상(죄)를 상징한다. 바로는 사탄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상의 사탄으로부터 건져오신 것이다.  1장 35-39절『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가복음 1장 16-20절『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 삼으셨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거동락하며 3년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들은 모두 어부들이었다. 어부라는 말은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지만,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다. 낚는다는 것은 미끼로 걸려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세상에 온 영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부를 등장시킨다. 영의 구원은 마치 낚시를 하듯이 하는 것임을 보여주신다. 낚시하듯이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결국 임마누엘 사람으로 되게 하기 위함이다. 임마누엘이 된 사람도 다른 사람을 낚아서 임마누엘이 되게 한다. 임마누엘은 주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의미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그래서 바다에서 물고기를 건지듯이 흑암 속에 빠져 있는 죽은 영들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흑암 속에서 죽어 있는 영을 구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빛을 보내주어야만 한다. 흑암에 있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그래서 물질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생명의 빛을 받기 전에는 갇혀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생명의 빛을 보내 줄 수 있는 분은 성령이시며, 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 또한 그들에게 빛을 비춰줄 수 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1장 21-22절『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1장 9-11절『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호이 우라노이)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톤 우라논)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냐 함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시다. 그런데 세례요한으로 부터 물세례를 받은 이유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의 몸이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 보좌에서는 아버지로, 그리고 이 세상에 육체로 태어났을 때는 이름이 예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그리고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마치 하나님이 세분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톤 우라논도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늘로부터 성부의 음성이 들리며, 그 분이 아들(호 휘오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시며 돕는 성령이 그리스도 위에 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호 휘오스는 관사가 있는 아들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된다. 호(관사)가 없으면 그냥 아들(양자)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파루시안(임마누엘:하나님의 임재)이 되는 것이다.  호이 우라노이 역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세례를...

헬라어 성경과 개역개정 성경과 대조 분석

 https://m.cafe.daum.net/oldnewman135/ju8D/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장 1절『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다. 마가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바나바의 조카였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타나는 마리아가 마가의 어머니였다. 사도행전 13장 5절에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즉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떠날 때, 수행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요한이라는 사람은 바로 마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가의 또 다른 이름이 요한이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서『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마가가 버가에서 중도하차를 하게된 것이다. 버가는 험지인 산악지방을 앞두고 있는 지역이다. 중도하차 한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표현되지 않으나, 이를 계기로 바울이 마가를 선교 활동에 좋지 않은 선입감을 갖게된다. 아마도 힘든 선교 여행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에서『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울은 선교 여행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마가가 등장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4장 9-11절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사도행전 28장 16절『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로마를 향한 항해를 처음 시작할 때 바울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죄수에 불과했지만, 항해를 마칠 때 바울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것은 바울이 고귀한 신분이나 지위에 속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위기와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바울의 신앙의 모습 때문이었다.  누가는 바울이 경비병 한사람만 딸린 채 영외의 가택에 연금되는 관대한 조치를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례로 보면 바울은 먼저 황제근위대의 대장에게 인계되었을 것이고, 근위대장은 죄수인 바울을 황제의 시위대 감옥인 프레토리움에 감금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시간이 지난 후 바울을 다른 죄수들과 분리하여 프레토리움 밖에 있는 일반 가옥에 따로 있게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군인에 의해 따로 감시받으면서 군영 밖에 있는 셋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은 매우 관대한 처우였다. 바울이 이렇게 선처를 받은 이유는 아마도 총독 베스도의 호의적인 조서와 더불어 바울을 호송한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에 대해 경험한 대로 작성한 보고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러한 생활이었을 지라도 죄수의 신분으로서의 생활은 매우 제한적이고 힘든 일이었다. 바울은 군영주위에서 일정한 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또한 죄수와 간수를 언제나 하나로 묶어 두도록 규정된 로마법을 고려해 볼 때, 늘 간수의 통제 하에 모든 활동에 제한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28장 17-19절『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사도행전 28장 1-2절『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타고 압송되는 바울은 한 사람의 죄수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 여행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바울은 출항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죄수 호송책임을 맡은 백부장에게 피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바울보다는 경험이 훨씬 풍부한 항해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에 귀를 더 기울였다. 그러나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결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증명되었다.  죄수에 불과한 한 사람의 충고를 무시했던 결과가 가져온 엄청난 재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재난 속에서 바울 일행을 제외한 270여 명의 사람들은 생존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절망과 공포에 빠져있었다. 바울의 위기대처능력과 영적 리더십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재난으로 인한 절망과 공포 가운데였다. 바울은 자신들만 탈출하려고 하는 선원들을 막고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죄수에 불과한 바울의 말을 일고의 여지도 없이 무시했던 백부장이 이제는 바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주었다. 백부장의 태도가 돌변한 건 단지 바울이 재난을 정확하게 예측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울은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바울은 구원의 소망이 없어진 그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 하나님이 자신뿐 아니라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건져주실 것임을 알려주었다.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죄수를 통해 말씀하셨다. 영향력이나 리더십은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276명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지 않고 멜리데라는 섬에 구조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 원주민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28장 3-5절『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사도행전 27장 23-26절『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이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이 부는 배에서 한 말이다. 바울은 여러 날 동안 풍랑이 계속치고, 먹지도 못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을 전하면서『배의 손상 외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라도 천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시대는 대부분 천사에 대해서 믿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고 있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음성을 직접 듣고 믿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간접적으로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다. 믿음은 자기 자신이 글로서 된 것을 믿는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으로 믿음으로 믿는가는 차이가 있다. 자기 자신이 믿는 믿음은 어떤 상황이 오면 사라질 수 있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27장 27-32절『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사도행전 27장 1-2절『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사도 바울과 누가는 배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며, 백부장 율리오가 그들과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게 되었다. 바울은 죄수는 아니지만 미결수 상태였다.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노쇠하고 병약한 바울의 곁에 필요했기에 누가가 동행했을 것이다. 이 길고 어려운 항해의 길에 두 사람 외에도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게 되었다. 로마로 가는 길은 배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27장 3-8절『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가다가 루기아의 무라 시에서 이달리아로 가는 배를 갈아탔다. 바다 바람 때문에 어렵게 항해를 하다가 라새아 시와 가까운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예언을 주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로서, 그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27장 9-11절『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사도행전 26장 19-20『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회개하고 돌이켜져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 이것만이 살길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들은 음성이『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그 다음에 죄사함이 나온다. 죄사함은 예수의 피만이 적용된다. 예수의 피로만 우리의 죄가 씻어진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피로 씻는다고 해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살아나야지만 죄가 예수의 피로 씻어지는 것이다. 영이 살아나야지 하나님이 이렇게 죄를 씻어주신다는 말이다. 내가 죄를 고백한다고 죄가 피로 씻어지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죄를 씻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몸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믿음인 것이다.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였는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분리된 것이다. 그래서 돌이키라는 것이다. 26장 21-23절『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선지자들과 모세가 장차 되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 바로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한 이것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이루어 갔던 것이다.  26장 24-25절『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사도행전 26장 1-3절『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바울은 새롭게 부임한 총독 베스도와 분봉왕 아그립바, 그리고 그의 누이 버니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25장에 이어 26장에서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특별히 26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과거 유대교 믿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26장 4-6절『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에팡겔리아스)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바울은 유대교에서 핵심으로 활동하였으나 갑자기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가운데 그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을 고백한다. 바울의 인생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바울은 그가 남은 생애를 어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된다.  바울이 그의 소명으로 여기며 일평생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의 삶을 잘 요약해 줌과 동시에 이 말씀은 신약 성경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선교에 관해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총독과 분봉왕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생명...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사도행전 25장 13-14절『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 신임총독 베스도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난감한 문제를 상위법정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유대인과 바울 간에 고소와 변론에 대한 상소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유대 종교와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찾아왔다. 베스도에게는 지금 자신의 상황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A.D. 48년에 삼촌이 다스리던 레바논과 안틸레바논 사이의 작은 왕국을 이어받아 다스리고 있었다. 또한 그는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과 회당의 통치권도 로마로부터 위임을 받아 가지고 있었으며, 53년에는 빌립과 루사니아가 다스리던 지역을 포함하는 더 큰 영토를 받기도 했다.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새로운 로마 통독이 부임할 때마다 본문처럼 예방하여 경의를 표하곤 했다. 그리고 함께 동석한 버니게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이며 남매가 함께 베스도 총독을 찾아온 것이다.  25장 15-19절『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베스도 총독은 자연스럽게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 사건에 대...

바울이 가리사 앞에 서게 되리라

사도행전 25장 1-3절『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네로가 황제로 있던 당시 벨릭스에 이어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권력을 위임받은 베스도 총독에게 청탁하여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지난 2년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베스도 총독에게 청탁할 것들, 논의할 것들이 많았을텐데,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먼저 꺼낸 것을 보면, 지난 2년간 그들의 바울을 향한 얼마나 분노와 노여움이 컸는지 짐작 할 수 있다. 25장 4-5절『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무사히 감금되어 있으니, 그를 고발하고자 하면 자신과 함께 내려가자고 말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더 높고 강한 권력을 가진 유대의 총독 베스도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호의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카리스 즉, 은혜로 여기려 했을 것이다. 반면,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아무런 호의를 더 높고 강한 권력자를 찾아 구걸하지 않았다. 25장 6-7절『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약 8-10일쯤을 보내고 가이사랴로 내려갔다. 이튿날 바울을 불러 재판장...

바울을 고발하다

바울을 고발하다 사도행전 24장 1-4절『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바울의 공판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몇몇 장로와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대동하여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에 와서 바울을 고소하였다. 100km가 넘는 아주 먼 거리를 대제사장이 직접 왔다는 것과 유대법과 로마법을 두루두루 잘 알고 있으며 아주 뛰어난 언변가였을 것이라 여겨지는 더둘로라는 인물을 대변인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 아나니아를 위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바울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또한 바울을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의지가 어떠한지 잘 드러내고 있다. 24장 5-9절『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아이레세오스)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는 아첨의 말을 시작으로 바울을 고발했다. 고발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바울은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이며, 마치 전염병과 같은 자라고 고소한다. 한 사람을 통해 전염된 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많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바로 바울이 로마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전염병 즉 폭등의 불씨와도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잦은 폭등에 시달려온 총독 벨릭스에게 폭등의 불씨와도 같은 전염병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보통 ...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니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니 사도행전 23장 16-19절『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바울에게 친척이 있음을 언급한 유일한 내용이다. 바울은 생질로부터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의 암살 계획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의 계획이 구체적인 것을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백부장에게 천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고, 천부장에게 자신을 살해하기로 결심한 유대인들의 계획을 생질을 통해 알렸다. 여기에서 동사의 대부분은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인도하심을 알 수 있다. 23장 20-21절『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천부장은 바울의 생질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루 전 날 있었던 분쟁을 목격한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3장 22-25절『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천부장은 밤 제 삼시에 백부장 둘을 불...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사도행전 23장 1절『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아가데:기본형은 아가도스))에 양심(쉬네이데세이)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아가데는 선하다라는 의미다. 선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쉬네이데세이는 쉬(함께)와 에이도(알다)의 합성어이다. 양심은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임마누엘)는 것이다. 섬기다 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는 표현이다. 23장 2-3절『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에이페넨) 회칠한 담(토이케 케코니아메네)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바울이 말하는 것이 신성모독처럼 들리므로 대제사장(사두개인)이 바울을 쳐라 라고 말한 것이다. 사두개파는 상전의 제사를 담당하고, 바리새파는 율법을 담당하고 있었다. 토이케 케코니아메네는 더러운 곳을 감추기 위해 회칠을 한 담이라는 말이다. 겉은 하나님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썩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에이페넨은 말하다 라는 의미로 아오리스트 시제로, 순간 호 로고스가 바울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23장 4-5절『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에이판)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여기서 에이판은 미완료시제로서 바울이 자신의 생각대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다. 23장 6절『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에크라젠)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바울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지혜롭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사도행전 22장 16절『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에피칼레사메노스)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에피칼레사메노스는 세례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연결된다. 다시 번역하면『세례를 받고 주의 이름(오노마 아우토:호 로고스)을 불러 죄를 씻으라』는 것이다. 죄를 씻는 의미는 죄가 제거되는 것이다. 죄는 세상죄를 짓는 것도 좁은 의미에서 죄이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입으로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마음의 회개의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그 동안의 삶에서 자신의 주인된 삶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세례는 형식적으로는 물 세례로서 죄를 씻는다. 동시에 마음에서 할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세례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구원의 성령으로 사람의 속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사역자로서 나아갈 때 권능을 주기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권능이 주어져서 각종 표적과 기사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 때의 성령은 돕는 성령(보혜사)으로서 위에서 역사하신다. 22장 17-20절『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바울은 다시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대화를 하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가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이 주시는 예언...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사도행전 22장 1-3절『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였지만 히브리어를 말했다. 그의 첫 변론에서 바울은 분노한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 서 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쳤던 군중들을 연상케 한다. 바울의 앞에 있는 군중들은 모두 바울을 혐오하며 미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궁중 앞에 변론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군중 앞에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자신은 모세의 율법을 어길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내용으로 자신을 변론하고 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 『나는 죄가 없으니 풀어달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의 율법에 관해 누구보다 열심이던 자신은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감옥에 가두며 죽이기까지 하였던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이야기한다. 가말리엘 문하라는 것은 가말리엘 이라는 학자의 제자였다는 말이다. 22장 4-5절『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군중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입장에서 바울을 죽이려 했다. 그들 앞에 바울은 자신도 이전에 군중 속에 한 사람이라 소개하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2장 6-8절『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사도행전 21장 15-16절『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은 성령께서 순간 순간 하시는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21장 17-18절『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과 마주앉았다. 한쪽에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자리를 잡았고, 맞은편에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 야고보와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자리를 잡았다. 양측의 만남은 감동의 시간이었다. 21장 19-20절『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이방 가운데에서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했고, 사도 야고보와 장로들은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그들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싸고 기저에 미묘한 긴장이 도사리고 있음을 저자 누가는 피하지 않고 묘사하고 있다. 21장 21-24절『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사이에 사도 바울에 관한 괴소문이 돌고 있었다. 바울이 이방 곳곳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사도행전 21장 1절『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박과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기어코 올라가고 있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결박과 죽음마저도 받아들이겠다는 바울의 마음이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결박과 죽음으로 위협하는 자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신이 핍박했던 그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과 죽음의 길을 스스로, 자발적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21장 4절『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디아 토 프뉴마토스)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엘레곤)』 디아 토 프뉴마토스는『성령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엘레곤은 미완료 과거시제이다. 성령을 통해서 라는 말은 아오리스트 시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으로 성령이 하시는 말인 것처럼 여겨져서 한 말이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했는데, 바울은 권함을 받지 않았다. 그들의 권함을 바울이 받지 않자 14절에서『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여기에서 성령은 토 프뉴마(Holy Spirit)이다. 바울이 말하기를『나는 성령의 매임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도시를 옮길 때마다 성령께서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다.『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해준다는 것이다. 21장 5-6절『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덴테스 타 고나타) 기도하고(프로슈카메노이) 서로 작별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