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6장 6-7절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세례가 생명을 얻는 것이요,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다. 세례라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 안에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6장 3-4절에서 설명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장사되는 것이다. 7절에서『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죽은 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말한다. 죄에 빠져 있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짓는 행위와 그 결과 만을 놓고 죄를 회개한다. 죄의 결과를 통해서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죄의 뿌리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출애굽때 유월절 날 먼저 하는 일은 피를 칠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죽이는 것이다. 각을 떠서 난자한다는 뜻이다. 죽이는 자는 양을 가지고 있던 자다. 그 사람의 죄 때문에 그가 아끼는 어린양을 난자해서 죽여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그렇게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 죄를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죄를 고백만 하면 예수의 피로 씻어진다는 말을 믿고 있다. 죄인이 죽어야만 죄가 없어진다. 그래서 죄인의 대리자 어린양을 죽이는 것이다. 그 어린양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양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인이 죽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 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

자아는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마태복음 16장 21-23절『 이 때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자아는 사단을 이길 수 없다. 하와는 죄가 없었을 때 에덴동산에서 뱀을 만났다. 사단이 그녀를 노리면서 말하기를『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라고 물었다. 사단이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해 최초로 한 것은『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고 말한 것이『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하와는 계명이 하나인데 그것 조차 기억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하와가 기억을 잘 못하는구나』라고 뱀이 알아차렸다.『너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알아? 그것을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이지』라고 속였다. 사단이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다. 하와는 하나님께 뱀이 말한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잃어버린 것이 바로 예배였다. 사단에 속은 이유는 주님께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옥에 가서 고문을 당하고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었지만 그날 밤 찬미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인생의 어려운 때가 오면 제일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주를 향한 기도와 예배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을 광야에서 시험하셨다. 주님은 믿음을 시험하신다. 시험하신 다음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 시험이 없다면 방종하고 교만해 질 것이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늘 기도와 예배가 끊이지 않아야만 한다. 그런데 하와는...

두 종류의 믿음

요한복음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에서 믿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뒤의 것은 그 사실에 입각해서『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생명을 얻어야 구원받는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표현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육적인 내가 믿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믿음이다. 앞의 것은 객관적 사실 확인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귀신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했다. 사실 확인이 구원은 아닌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뒤의 것은 그 사실과 연합되어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믿는 믿음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믿음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례요한이 말한 다음에 성경에서 최초로 말한 자는 귀신들린 자다.『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엎드려 절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잠잠하라』라고 했다. 출처가 귀신이므로 경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는 구원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게 구약에서 말하는 출애굽이다. 유다서 1장 5절에서『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생명을 얻는 믿음』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믿음이며『그 이름을 힘입는』믿음이다.『그 이름을 믿으므로』는『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그 이름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 16절에서 말하는『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나지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12절『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이『모든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성경에『안식과 기업』이라는 말은 있지만『기업과 안식』이라는 말은 없다.『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있지만『꿀과 젖이 흐르는 땅』은 없다. 주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에 안식과 기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가나안 땅이 있는 자에게는 안식으로 보인다. 내가 주인인 사람에게는 기업으로 보인다. 내가 얻어야 할 땅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6일 동안 하신 일에서 일곱째 날에 하나님과 안식했다. 구원의 시작은 먼저 안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주님은 안식을 주신다. 그 안식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신다. 그 기업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그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은 성경에 젖뗀 아이의 평안이라는 말이 나온다. 젖은 아기로 인하여 엄마를 안식하게 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꿀은 전쟁을 이겨서 기업을 얻게 하시는 말씀이다. 요나단과 전쟁할 때 사울왕은 어리섞게 꿀을 먹으면 이기는데, 전쟁에 이길 때까지 꿀을 먹지 못하게 했다. 요나단은 전쟁을 하다가 피곤해서 꿀을 집어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전쟁을 이기는 양식은 꿀 같은 말씀이다. 성경에는 순서에도 영감이 있다.『진리의 사랑』이라는 말은 있어도 『사랑의 진리』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사랑의 진리』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사랑이 무엇인가』를 논한다. 사랑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성경은『진리의 사랑』을 말한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11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이 부분은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다 믿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두번째 문장『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사도행전에 많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명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믿고, 그 이름을 힙입어』생명을 얻게 된다. 요한복음 1장 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게 그 이름을 힘입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하기를『애굽에 돌아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 모세가 묻기를『그들이 누가 보냈냐고 하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이름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름은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된다. 1장 13절에서『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이니라』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거듭난 자들』이라는 말이다. 교회 처음 나와서 영접기도 한다고 되겠는가? 주님은 거듭난 자들에게 기도라는 놀라운 것을 주셨다. 기도하면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거듭난 자가 기도하면 주님은 행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에서 기도처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윗은 시편이라는 기도를 남겼다. 성경에서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과의 직통 연결이다. 사람들은 안정된 생활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믿음은 영적인 문제이므로 육신은 믿음에 적응되지 않는다. 불안정한 삶이 지속된다면 영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육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된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는 자들은 흔들림 없이 기도할 것이다. 이게 거듭난 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맛나를 먹지 못하면 영적 힘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영접하...

세번 부인하리라

요한복음 13장 36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는 따라오리라』베드로가 변화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베드로가 말한『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와 유사하다.『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은『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믿는 믿음이 육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영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육신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하고 있다.『성령을 따르는 자만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낸다고 하지만, 그 열심은 회개가 없다면 육신의 열심이다. 사람들은 그 열심으로 인한 믿음을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 14장 전체에서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14장 22-23절에서『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 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주님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말을 지키는 자에게만 나타내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런 주님은 아무에게나 나타내시지 않으신다. 자신을 사...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한복음 16장 30-32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믿는다』고 하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믿느냐』라고 표현했는데 『너희가 드디어 믿게 되었구나』라는 표현이 아니다.『지금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라는 반문하는 말씀이다. 두 표현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너희가 드디어 믿게 되었구나』라는 표현은 인간 중심의『믿는다』라고 사람들이 해석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주님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지파의 대표 12명이 다녀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약속한 땅이 맞다』라고 말한 것이다. 열명은『거민을 삼키는 땅이다 들어가면 다 죽는다』라고 했다. 자기 판단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은 네피림이었다. 그래서 두려움이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말(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도 판단하지 못하는데, 오늘날 자신의 판단으로『구원이 어떠함』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의 선언이시다. 가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므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했다. 왕이 초대장을 보냈지만『다 일치하여 사양하거늘』라고 표현했다. 인류 역사에 왕이 초대했는데,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사양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직 주님의 나라에만 해당된다. ...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수기 21장 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라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 나온지 2년쯤 되었다. 길이 험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날도 아침에는 맛나를 먹었고, 사막의 더위에 구름 기둥이 있었다. 이들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바로왕의 군대가 물에 수장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표현한다. 매일 기적을 경험하고 맛나를 먹고,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 주어도 그게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변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들은 원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내 쫒으시고 천사들로 하여금 불칼을 들고 지키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몰랐던 하나님이시다. 처음에 그들이 보았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 공의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으로 가르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죄가 없었는데, 사단에게『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마귀의 밥이 된다. 구원은 주님만 바라보고 반응하는 것이다. 하와는 뱀과 대화하는 동안 한번도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을 괴롭힐 때 그들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내 백성으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하나님께서 환경을 개선하고 해결해 달라는 것』이 주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내가 ...

구원에 대한 말씀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서 광야에 나와서 40년 뒤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히브리 백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교회 처음 나온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잘못 인도되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는 6-9절까지의 말씀인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죽기 직전에 광야에서 40년이 되던 해,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말이었다. 신명기 말씀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홍해바다를 건넜던 옛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애굽으로 부터 나온 자는 광야에서 다 죽었다.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이 신명기...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교회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귀절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아드리고 있는데, 니고데모는 왜 말씀을 받아드리지 못한 것일까?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그를 믿는 자마다』의『믿는 자』가 바로 니고데모에게 하신『믿는 자』다. 교회 대부분 사람들은『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어느 시대에 나를 믿는 자가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 주를 찾는다고 하는데, 주님은 로마서 3장 11절에서『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신다. 왜 서로 다른가? 교회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람들 처럼 살지는 않으면서, 사도행전과 같은 그런 기적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제자들 처럼 되고 싶지만 예수님의 제자 처럼 살고는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고, 자신들의 기준을 중요하게 인식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받을 수 없었다.『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의미를 모르면 안된다. 창세기 15장에서 주님은 아브람에게『자녀를 준다』고 하므로 그것을 믿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런데 17장에서 주님이『자녀를 준다』고 하니 아브람이 웃었다. 완전히 믿지 않았다. 아브람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자신의 판단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백세가 되었고 사라가 구십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웃었다. 마찬가지로 교회 사람들이『예수를 믿는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부분『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인데, 나의 선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25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이것을 알게한 것은 너 스스로가 아니라 네 아버지께서 알게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음으로『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서 삼일 후에 살아날 것』을 말해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죄인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죽음의 값을 지불하러 오신 것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베드로가『그리마옵소서 절대 그 일이 당신에게 미쳐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나님 아버지가 베드로에게 계시를 알게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야기 했지만, 베드로는『그리마옵소서』라고 응답했던 것이다. 계시가 사람에게 임해도 계시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베드로는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육신적이다. 열심을 내는데, 육신의 힘으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없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닮으면 안된다. 이게『신복음주의』라는 가짜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구별되는 것이 거룩함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게 변하고 있다. 성전과 성막은 세상의 것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육신적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 일에 더 익숙한 것이다.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교회들은 환란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불에 타버리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고 볼 수 없다. 마지막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

마태복음 7장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이 산상 수훈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셨다. 많은 권능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자들에게『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거라는 것이다.『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주님이 알지 못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8-9절에서『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그 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는데』라고 말했다.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간증을 듣으면서 하나님을 알게된다. 이것을 우리의 믿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바 되는 것은 회개한 자를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주님이 회개하는 자를 아는 것이 구원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알아야만 구원받는다. 회개없는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할 때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믿음이 사람의 마음에 새겼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의 조건은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하면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다. 회개는 죄인됨이 예수와 더불어 죽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내가 주인임』을 없애야만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거듭남이요 변화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자아의 죽음과 회개에 대하여

누가복음 13장 1-5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신 당시 이런 유형의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는 빌라도라는 사람이 갈릴리 사람을 죽여 그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빌라도의 악과 빌라도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갈릴리 사람에 대해서『그 죽은 갈릴리 사람이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리고『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하리라』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질문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 예루살렘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을 더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보다 죽은 그 사람의 죄가 더 있는 줄로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다. 사고로 인하여 먼저 죽었는데, 살아있는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고 없이 더 오래 산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더 쌓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비록 죽었지만 일찍 죽는 사람의 죄가 덜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살아있다는 것이 은혜의 기회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회개를 지적하기 위해서『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하셨다. 이게 예수님이 보시기에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의 기준이 된다. 욥은『고통』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욥기는 특수한 사람의 내용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당시에 주님을 가장 잘 믿은 사람으로 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7-10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출애굽, 광야, 가나안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히브리 백성은 바로왕의 압제 하에 어려웠다. 히브리 백성들이 부르짖었다. 히브리 백성들이 유월절에 깨달은 것은 애굽인이나 히브리 백성이나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진노를 넘어가게 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온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르짖는다. 그 뿌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사람들이 죄 사하심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갈 때 세상 일로 염려하지 않게된다. 『세상 일로 염려하고 있는 것은 아직 죄 사하심을 받은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단 아래 있다』는 증거다. 세상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일로 염려하는 것이다. 요한1서 2장 15절『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세상 일로 염려하면 출애굽하지 않은 것이다. 출애굽을 하게 되면 예배가 시작된다. 세상으로 부터 탐심이 빠져나오면 예배가 시작된다. 주님이 예배하는 자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할 것이다. 성공과 실패 속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와 총명이다. 호세아는 주님의 선지자였는데,『바람난 여자를 사모하라』고 하셨다. 가정이 고통이 되었다. 그의 고...

시작하였으나 이르지 못하는 구원

히브리서 4장 1-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구원에 대해서『쉽게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우리의 노력으로는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수의 피로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따라서『믿기만 하면 천국간다』고 말한다.『이것을 받아드리고 믿으면 천국간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은1절에서 『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했는데,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처럼 기쁨과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 앞의 내용은『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만든 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관계로 격노하셨다』는 말이다. 앞의 3장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이 맹세했다는 말이 나온다. 3장 18절에서『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그래서 4장에서『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기뻐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시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북을 한다. 과거에는 두만강만 넘어면 기뻐했지만, 지금은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히면 끝이다. 두만강을 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은 한국 땅을 밟지 않고서는 안심하지 못한다. 그들의 구원은 북한을 탈출하는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장 21-23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하면서 전하라』고 했다. 전하라고 하신 것은『용서』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면서 숨을 내쉬면서『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신약에서 헬라어로『숨을 내쉬면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그 코에 숨을 불어넣었다』와 같은 의미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급한 바람처럼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 처럼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마지막에 기록된 것인데, 요한복음에만 『숨을 내쉬며(헬라어)』가 나온다. 요한복음의 성령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과 역사함이 다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성령이 사람들 위에 임하시면 능력을 받는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성령이시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정도는 아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하셨다. 이 두 도시에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해셨지만 ,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누가』에 의해서 기록되었는데,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능력이라고 했다. 이 말씀이 사도...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26-27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는『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받는다. 세례는 물에 들어가서 죽고 새 생명 가운데 태어난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는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결심이나 세상 삶의 성실함과 선행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합하는 조건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무엇이 죽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육체를 죽일 수는 없다. 육체 속에 숨어있는 죄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죄에 대해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표현한다. 로마서 6장 4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는 우리의 죽음이며, 이 죽음이 바로 죄에 대한 것이다. 십자가의 피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죄 사하심은 사람들의 허물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이시다. 그래서『용서』라는 말을 가끔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 처럼『지나간 죄에 대한 용서』라고 불린다. 『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주기도문에서도 죄를 사하심은 조건이 붙어있다. 이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죄만 용서 받으려고 한다면 큰 후회를 당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가죽 옷을 입은 것 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 분을 입은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들이 『예수믿기로 결심...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

로마서 3장 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자인지, 은혜 아래 있는 자인지 모르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심판과 지옥에 대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많은 교인들이『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심판에 대해서 말해야 할 사람들도『교인들이 싫어하니까』말하지 않는다. 지옥이 두려운 자는 죄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증거다. 죄를 가까이 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있는 자도 자신이 율법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죄 아래 있다는 것과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상태는 같으나 서로 다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모르면 죄 아래 있는 것이다. 죄 아래 있는 자는 죄를 깨닫지 못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죄 아래 있는 것을 깨닫는 자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데,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 아래 있어서 못 견디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마치 사단이 이 세상에 없는 것 처럼, 죄가 없는 것 처럼 즐겁고 재미있게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결국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사단은 넘어 뜨리려고 하는 자에게 죄를 짓게 한다. 사단은 그냥 두어도 죄를 모르는 자에게는 시험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자는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경이 왔을 때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하나님으로서 믿는 것이다. 탕자의 하나님을 붙잡고 있다.『달라는 대로 다 주시고, 돌아오면 그대로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이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마지막 비유로 하셨다. 탕자의 비유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 그런데 그 앞의 두가지 비유가 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죽어있는 동전의 비유다. 예수님이『이같이 죄...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누가복음 12장 49-50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이 임한 다음에 외쳤는데, 죄사함을 향하여 가는 회개의 물세례를 외쳤다. 그리고『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라고 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무조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크고 작은 죄에 대해서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으며, 피흘리심이 없는 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되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서 죄 사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 피흘림은 죄인이 흘리는 피가 아니라 의인이 흘려야 대속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시는 것이다. 피의 대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합되는 자도 같이 죽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그러면 예수와 연합된 자의 죄를 피흘림으로 대속하시는 것이다. 아무나 대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합되는 자에게만 피가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 피는 원래 죄인이 흘려야 하는 피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심판 때는 죄인이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로마시대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최전방이 형성되었다. 로마의 최강 10군단이 카이로로 부터 갈릴리까지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가혹한 세금을 내어야만 했다. 그들이 겪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벽과 같은 뿌리가 있음을 많은 유대인들이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죄로 인한 것을 깨닫고 세레요한에게로 회개와  죄사함을 받기위해 갔던 것이다. 오늘날 현실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어려움의 원인들은 다양할 것이나, 회개하지 않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뿌리가 있음을 발견해야만 한다.『하나님없이도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그런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