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사도행전 19장 21-22절『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신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앞으로의 전도 일정과 관련해 오늘날의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울과 협력하던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고 바울 자신은 잠시 더 에베소에 있었다. 19장 23-26절『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바울은 실제 엄청난 권능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호 로고스를 전해주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바울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유는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가져오게 된 자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19장 27-29절『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은으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던 은 세공 기술자들 중 데메드리오가 나서서 자신들의 생업과 풍족한 생활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장 1-2절『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어떤 제자들은 아볼로의 제자들이다.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었는데,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볼로는 성령에 대해서 알고, 다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제자들은 왜 성령에 대해서 모르는가? 기독교의 핵심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신앙이다. 그런데, 성령을 모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아볼로가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성령에 대해서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이 이와 같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예수를 믿고,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를 믿는 것이다. 현재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알지도 모르는 것이다.  19장 3절『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요한의 세례는 물 세례를 의미한다. 물세례는 죄를 씻는 형식적 세례와 마음의 할례라고 부르는 세례와 연결된다. 마음의 할례가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물세례는 죄를 씻는 형식적 세례와 마음의 할례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도가 물 세례를 받을 때 죄를 씻는 정도로 생각하면,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적인 물세례는 마음의 할례와 연결되어야 한다.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세례는 다시 태어나고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모르는 신도가 오직 물세례만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대부분 신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이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자녀와 아들은 다른 차원이다.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사도적인 소명을 받아야 하며,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능력과 권세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성령세...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

사도행전 18장 18절『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케이라메노스)』유대인들은 서원기도를 할 때 머리카락을 자르는 전통이 있었다. 케이라메노스는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그런 율법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성령이 그렇게 인도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서원이 이루어질 것을 이 행위를 통해서 확신하라는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생의 한 걸음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앞으로의 인생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다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물론 그것은 이전까지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들 부부는 바울과 같이 고린도에 머물렀고, 수리아로 떠났고 에베소에 이른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아볼로라하는 유대인을 만났다.  18장 19-20절『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우크 에페네오센)』우크 에페네오센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로 성령께서 하락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각 지역에서 작별하고 떠나는 모든 과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에베소에서 작별할 때 남긴 말을 기록하고 있다.  18장 21절『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했던 바울의 전도여행은 작별과 떠남의 여정으로 기록된다. 그는 1년 6개월 간 머물렀던 고린도에서 작별하였고, 에베소에서는 더 오래 있기를 청하는 사람들과 작별하고 떠났다. 바울은 에베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떠나지만 먼 훗날 다시 돌아올지는 알지 못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은 1년 6개월을 머물렀던 고린도에서 사람들과 작별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에베소 회당에서 유대인과 변론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의 청을 등지...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행전 18장 1-3절 『그 후에 바울이 아덴(아테네)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본토:로마)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의 도시였다.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이 때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천막 제조업자들이었다. 바울은 이 부부의 집에 함께 살면서 주중에는 천막을 만들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들 부부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랜 기간을 머무르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바울의 동역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고린도로 내려와 합류했다. 18장 4-5절『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쉬네이케토 토 로곤 호 바울)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로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쉬네이토 토 로곤 호 바울은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없는데, 한글 개역개정에는 포함시켰다. 쉬네이게토는 미완료 수동태이다. 쉬(함께)와 에코(소유하다)의 합성이다. 해석하면 함께 소유되었다 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되었다 라는 말은 바울이 말씀이신 호 로고스와 하나가 되어 성부 하나님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사역은 사도적인 사역과 은사적인 사역이 있는데, 빌립 집사와 같은 경우는 대체로 은사 사역이라면, 바울은 사도적인 사역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호 로고스를 통한 사역을 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6장 2-4절에서 열두 사도가 제자를...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사도행전 17장 18-21절『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그노나니)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아덴(아테네)에서의 전도에 대한 말씀이다.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바울에게 격렬한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쾌락주의자들인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이성을 절대시하던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바울에 대해 쓰레기 같은 말쟁이라고 욕을 한 것이고, 또 어떤 자들은 바울을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을 좀 더 상세히 듣기 위해 사람들이 북적대는 장터에서 떨어져 있는 독립된 공간인 아레오바고로 바울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들이 바울에게 알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노나이는 기본형이 기노스코인데, 관계(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개념이다.  17장 22-23절『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아그노스토 데오)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긴다고 지적했다.  아그노스토는아 아(부정)와 그노스토(알다)의 합성어다. 즉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신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참 하나님을 소개하며, 참 신을 소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살아계신 ...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

사도행전 17장 1-3절『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에이오도스)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에이오도스는 방식이다. 바울이 늘 하던 자신 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회당이 있는 곳에서는 의례히 거기 들어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방법이었다. 회당은 성전이 아니다.  바울은 거기서 세 번의 안식일에 구약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 바울이 그곳에서 세번이나 강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비록 개종한 헬라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로서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강론은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정복자의 통치와 억압의 굴레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를 지칭한다. 그러기에 그런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자신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말하려면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했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했다.  17장 4-9절『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사도행전 16장 1절『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 훗날 믿음의 아들이 되는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앞서 미리 디모데를 준비해 놓으시고 바울을 기다리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와 조력자들을 반드시 붙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디모데의 부친은 헬라 사람이고 모친은 유대 사람이었다. 즉 디모데는 유대적인 배경과 헬라적인 배경을 동시에 가진 신실한 믿음의 형제였다. 디모데는 모친의 혈통으로는 유대인이 되고 부친의 혈통으로는 헬라인이 되기에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이 있고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이 있는 것이었다. 16장 2-3절『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라본) 할례를 행하니(페리에테멘)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런데 디모데가 유대인 자격으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면서 유대인을 만나게 되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마찰이나 갈등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가 할례를 받게 한 것이다.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바울의 생각이라기 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다. 라본과 페리에테멘은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분명하게 복음에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믿는 유대인들이 할례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디모데의 부모가 다 이방인이어서 디모데도 완전한 이방인이었다면 성령께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되고 율법 ...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사도행전 15장 23-27절『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투 오노마투스:호 로고스)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반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고보의 선언이 있자 자신들의 주장을 꺾는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 두 사람들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신뢰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남을 인도했던 이들이 이제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녀야 했다. 바나바와 바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서명한 편지의 보증인이 되어야 했다. 이것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할 편도여행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묵묵히 순종했다. 나아가 실라는 마가 요한이 가기 무서워 이탈했던 험준한 산맥을 향해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15장 28-29절『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오늘날도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채, 규정에만 얽매여 있다(율법주의). 그래서 지키느니 마느니 라고 말을 한다. 율법은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규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에 있다. 그것을 깨달아 현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15장 30-35절『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장 1-2절『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우 뒤나스데 소데나이)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신 것에 대해 나누었다. 이 때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와서 이방인은 모세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 뒤나스데 소데나이는 아우리스투 시제로서 성령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할례를 받아야 성령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 출신의 할례파 신자들의 주장은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할례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두고 안디옥교회에서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15장 3절『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인 형제들을 만나 이방인들을 전도한 일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또 전하는 일이 있었다.  15장 4-6절『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호 데오스 에포이에센 메트 아우톤)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호 데오스 에포이에센 메트 아우톤은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임마누엘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

구원 받을 만한 믿음

사도행전 14장 1절『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에이셀데인) 말하니(랄레사이)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에이셀데인과 랄레사이는 아오리스트 시제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들어가고 호 로고스로 말하는 것이다.  14장2-7절『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에페이데산테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에피 토 퀴리오) 담대히 말하니(팔레시아조메노이)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에피 토 로곤)을 증언하시니(마르투룬티)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쉬니돈테스) 도망하여(카테퓌곤)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에페게이란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에피 토 퀴리오는 주님 위에서라는 것이다. 팔레시아조메노이는 파라(많은)와 시아메노이(말하다)의 합성어로 호 로고스로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즉 주님 위에서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에피 토 로곤은 은혜의 말씀(호 로고스) 위에서 라는 것이다. 마르튀룬티는 증언하다라는 의미다. 즉 호 로고스 위에서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증언을 한 것이다. 쉬니돈테스와 카테퓌곤이라는 동사도 아오리스트 시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양이다.  14장 8-11절『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에쿠신) 바울이 주목하여(아테니아스) 구원 받을 만한 믿음(피스틴 투 소데나이)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사도행전 13장 28-31절『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셋째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고 말한다. 비록, 유대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깨닫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죽은 그를 부활 시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다고 증거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에 역사하심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13장 32-35절『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호시아 다위드 타 피스타)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호시아 다위드 타 피스타는 다윗의 거룩한 믿음이다. 이 거룩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 성도는 누구나 다윗의 이 거룩한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너희에게 준다고 말한다. 너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유대교를 믿는 자들이다. 믿음의 근원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한다. 열방의 아비(믿음의 조상)로 삼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겠다는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이 상속에 대한 약속을 백성들에게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도바울의 안디옥에서 설교

사도행전 13장 13-14절『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배경은 구르보 섬에 위치한 바보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를 통과해서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는 약 2240km의 여정으로, 약 2년동안 펼쳐진 전도여행이었다. 버가에 이르러 요한 (여기서 요한은 마가 요한을 뜻함) 이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바울일행은 버가에 도착하자마다 해안 도시의 독특한 기후로 인해 바울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이로 인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이를 위해서는 험난한 산맥을 넘어야 했던 것이다. 어린 마가요한이 보기에, 바보에서 버가까지 어렵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병에 걸린 바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울과 그 일행들은 거친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마가요한에게 그 산맥은 단순히 험난한 산행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전도자의 삶에 닥쳐온 고난이라는 산맥이었던 것이다. 결국, 마가요한은 더 이상 바울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울에게서 마가요한은 더 이상 함께 동역할 수 없는 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 결과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마가요한과 동행하고자 했던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된다. 바울과 일행들은 병에 걸린 몸을 이끌고 산맥을 넘게 되었다. 그들이 넘어야 하는 산맥은 마가요한을 도망가게 한 엄청난 두려움과 고난을 뜻한다. 산맥을 넘으면서 병을 이겨내야 했으므로, 목숨을 건 산행일 수밖에 없었다. 그 두려움과 고난의 산맥을 바울과 그 일행들은 함께 넘었다.  13장 15-19절『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레곤테스) 하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사도행전 13장 1절『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로 불리는 지도자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사울 이렇게 다섯명이었다. 바나바는 구브로출신 정통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이 있었는데, 시므온은 흑인 개종자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루기오라는 사람이 안디옥교회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구레네 사람 즉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지역 출신이었다. 마나엔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수식이 붙어 있다.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양육 받고 자랐으며, 비록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는 부유한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랐을지 몰라도, 불의한 지배계층 출신이다. 사울 역시 초대교회를 심하게 핍박하던 자였다.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과연 하나됨으로 한 교회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종적 배경, 출신, 신분, 계급이 달랐다. 그런데 이런 차이를 넘어 그들과 그들이 속한 교회는 한 비전 아래 하나됨을 이루어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이것을 가능케 한 힘은 바로 복음이었다.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동일한 한 가지, 즉 그리스도가 그들의 참된 진리며, 보물임을 똑같이 발견했던 것이다. 그 복음이 그들을 완전히 다른 삶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리스도의 보물을 발견한 그들은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며 살았다. 복음의 은혜와 복음을 철저하게 붙드는 그들을 통해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교회로 더욱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되었다.  13장 2-3절『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사도행전 12장 1-3절『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헤롯 왕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 유대를 통치했던 헤롯 대왕의 손자의 헤롯 아그립바1세다. 헤롯 왕은 친유대교적인 정책을 펴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을 탄압하고 핍박한 사건이 나오는데,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임으로 사도 중 첫 순교자가 되게 하였다. 야고보를 죽인 일로 인해 유대인들이 기뻐했다고 증거한다. 기분좋게 만족할 정도로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헤롯 왕은 베드로까지 옥에 가두며 기독교인들을 향한 탄압을 지속하였다. 헤롯은 초대교회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도 잡아들이면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을 더욱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드로를 옥에 가둔 시기는 유대교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 기간이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유월절 시작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이다. 헤롯 왕은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이 지난 후에 베드로를 공개 처형함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기를 원했다.  12장 4-5절『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프로슈케)』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교회(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프로슈케의 기도했다. 기도는 프로슈케와 유케가 있는데, 프로슈케는 심령 속의 성전에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에게 들어가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고, 유케는 일반적으로 신도가 신에게 자기의 소원과 복을 비는 그런 기도를 의미한다. 그 간절한 기도는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바로 ...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사도행전 11장 19-21절『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톤 로곤)을 전하는데(랄룬테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엘라룬) 주 예수를 전파하니(유앙겔리조메노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랄룬테스 톤 로곤은 호 로고스를 말했다는 것이다. 엘라룬은 마찬가지로 호 로고스를 말하고, 유앙겔리조메노이는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복음은 호 로고스를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 기독교인과 헬라인 기독교들에게는 호 로고스를 전했는데, 유대교인들에게는 성경에 있는 말만하고 호 로고스를 전하지 않은 것이다. 헬라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 그런데, 호 로고스에 대해서 말을 들은 후에 놀라운 그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는 것이다.  11장 22-26절『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엔 토 퀴리오) 머물러 있으라(프로스메네인)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아가도스) 사람(아네르)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엔 토 퀴리오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다. 프로스메네인은 오래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 안에 오래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아네르 아가도스는 선(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다. 아가도스는 하나님께 사용되는 용어다. 그래서 아네르 아가도스는 하나님의 가치있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은 동격을 의미한다.  안디옥의 부흥이 예루살렘 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사도행전 11장 1절『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호 로고스)을 받았다(에뎈산토) 함을 들었더니』호 로고스는 말씀아신 그리스도이시다. 에뎈산토는 받아드렸다. 받다와 받아드렸다는 말은 차이가 있다. 받다라는 말은 단순히 들었다라는 의미지만, 받아드렸다는 말은 호 로고스를 믿고 심령에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호 로고스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베드로가 무할례자였던 이방인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비난했다.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과 그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으로 이미 고정관념이 되었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강한 우월의식과 선입견은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11장 2-4절『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레곤) 이르되』 자신을 비난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명령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했다(레곤:간증).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사람이다. 따라서 환상 가운데 보이는 부정한 것들을 잡아먹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쉽게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순종할 수 없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의 가치와 신념을 단번에 흔들어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선민으로 삼으셨으나 이제 그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셨다. 이는 주님의 구원역사가 천하만민을 행하는 시대의 개막인 것이다.  11장 5-10절『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사도행전 10장 24-27절『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고넬료는 이방인이지만 경건하여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하던 중에 베드로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음성을 듣었다. 베드로도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보게 되고 곧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된다. 그들로부터 환상에 대한 자초지종을 듣고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오게 된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기다리면서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기다리고 있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자신의 집에 들어올 때에 얼마나 반갑고 감사하던지 그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려 맞이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극구 말리며 자신도 사람이라며 일어서라고 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가 평등하며, 계급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마치 계급이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한다.  10장 28-29절『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의 전통과 관습을 아주 중요하게 지키는 민족이다. 이방인들을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요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시는 것들을 극구 사양하며 부정한 것들을 거부하였지만, 하나님의 지시와 음성을 듣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접고 순종했다. 이 순종을 통해 복음은 이방인에게, ...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사도행전 10장 1-2절『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엘레에모수나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로마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한다. 엘레에모수나스(문법적으로 복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기독교적 사랑의 자선적 행동들을 의미한다. 다양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제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돕거나 남을 돕는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제를 통해서 구제받는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10장 3-8절『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앙겔론:천사)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 시몬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 밤 묵은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숙식하고 있는 것이다. 무두장이는 짐승의 가죽을 가공하는 사람으로 죽은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취급했기에, 유대인들에게는 협오대상이었다. 이방인 선교의 시작점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다. 천사가 나타나서 무슨 일인가 라고 묻는 것은 이전에도 이런 경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만나게 해주신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사역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사람을 욥바로 보내라는 것이다. 믿음의 들음이 중요하다.  10장 9절『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사도행전 9장 32절『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그 때는 바로 사울이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거쳐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낙향한 그때를 말한다. 그때 베드로는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룻다에서 중풍병에 걸린 애니아를 고쳐주는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베드로를 룻다로 이끄셨다고 추측할 수 있다. 9장 33-35절『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에이펜)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병상에 누워있는 애니아와 그를 간병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8년이란 세월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룻다에서 애니아를 본 순간,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다. 호 로고스이신 주님이 순간적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에이펜은 아오리스트 시제다.  주님은 애니아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그 자리를 정리하라고 말씀하셨다. 애니아의 삶의 자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곧 애니아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과 동시에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의 병고침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함이다. 육신의 병은 치료되었으나, 영적인 부분이 여전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때와 동일하다면 육신의 병이 고침받은 것이 진정한 고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육신의 병보다 더 큰 문제는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9장 36-39절『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도행전 9장 20-22절『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 그러자 사울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 그가 받은 예수의 말씀, 그가 만난 예수가 그를 예수의 증언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바울은 단지 한 두 곳에서 예수를 증언하고 그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각 회당에서 전파했다. 당시 다메섹에는 약 30여개의 회당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유대교를 변호하기 위해서 각지를 다녔던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각 회당들에서 더 이상 유대교가 아닌 예수에 대해서 변호하는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사울이 전한 예수에 대한 증언은 두가지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했다.  사울은 자신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인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신성모독으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만난 사울은 선포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죽인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다.』 유대교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독설을 퍼붓던 그 바울의 입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이 터져나왔다. 사울의 예수에 대한 두번째 증언은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것이다. 사울의 증언은 단지 경험과 내적 확신에 의한 증언일 뿐만 아니라 능력으로 도우시는 성령의 증언이기도 한 것이다. 성령의 공급해주시는 힘에 의하여 사울이 증언하고 있었다.  9장 23-25절『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행전 9장 1-2절『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테스 호두)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테스 호두는 그 길이다. 예수를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9장 3-6절『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페리에스트랖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페리에스트랖센은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사울은 빛을 보고 소리도 들었다. 아오리스트 시제는 헬라어에만 나타난다. 시간의 상황을 나타내며, 많은 경우 성령이 역사하시는 순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빛이 비추어지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것은 구약시대 모세가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여호와를 만나는 장면과 유사한 것이다.  9장 7-9절『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테스 포네스) 아무도 보지 못하여(메데나 데 데오룬테스)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22장 9절에서는『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을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라고 말한다.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테스 포네스나 메데나 데 데오룬테스는 현재시제로 되어있다. 바울이 들은 것은 아오리스트 시제이고, 같이 가던 사람들이 들은 것은 현재시제인 것이다. 사울이 들은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음성을 들은 것이고, 같이 가던 사람이 들은 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은(테스 포네스) 것이다. 그들이 들은 것은 바울이『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말하...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받는다는 소식

사도행전 8장 14절『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톤 로곤 투 데우)을 받았다(데뎈타이)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아페스테일란)』톤 로곤 투 데우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다. 데뎈타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시제로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아페스테일란은 아오리스트 세제를 사용하고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믿음을 완전히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영접기도와 비슷한 개념이다. 말로 주를 영접한 것과 주님을 정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말로 영접기도 했다고 해서 주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가 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거듭난 자가 되면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심령 속에 호 로고스가 임재하지 않은 자는 거듭난 자가 아니며, 주를 영접한 자가 아닌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그 말씀(호 로고스)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 두 사도는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의 새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했으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동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곳 신자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셨다. 성령께서는 빌립을 또 다른 이방전도에 사용하셨다. 박해 받는 복음을 더 널리 퍼뜨리시고 박해 아래 있는 교회를 더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게 이루어져 갔다. 열두 사도 못지않게 훌륭한 일꾼이었던 스데반이 너무나 일찍 순교한 사실은 교회의 큰 손실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8장 15-17절『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라보신)를 기도하니(프로슈케)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라보신은 성령을 영접한다는 의미다. 프로슈케는 심령 속에서 임재하는 지성소에 나아가는 기도다. 빌립...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장 1절『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에게네토)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디에스파레산)』사울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이 바라볼 때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단이었다. 에게네토나 디에스파레산은 아로리스트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성령이 이렇게 이끌어 가신다. 흩어지게 하므로서 복음이 더 빨리 퍼져 나가는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한 그날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위기를 맞게 되었고, 교회에 대한 박해는 한 때로 끝나지 않았다. 그 후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약 300년간 박해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박해는 분명 교회의 위기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는 기회였음을 교회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예를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는 사도들만 남기고 교인들을 유대와 사마리아 땅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붕괴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사람들은 무서워서 숨어 산 것이 아니라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8장 2-3절『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스데반과 사울의 모습을 대조시킨다. 사울이 그만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 선 것이다.  8장 4절『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톤 로곤)을 전할새(유앙겔로조메노이)』톤 로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복음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기쁜 소식으로 전했다는 것이다. 유앙겔로조메노이는 기쁜 소식으로 전하다 라는 의미다.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서 공인된 이후부터는 호 로고스에 대한 신앙은 사라지고, 기독교가 종교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8장 5절『빌립이 사...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사도행전 7장 44-47절『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성막은 제사가 목적이 아니라,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에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의 증거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장막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성막 곧 증거의 장막을 만들게 하셨다. 이 성막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인 장소이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성막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모세의 돌판 즉 증거판이 있고, 그 증거판을 넣은 궤인 증거궤가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기에 성막을 증거의 장막이라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회막이라 칭하여지기도 하였다.  스데반의 논증은 성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증거의 장막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었다. 이 증거의 장막은 모세 때에 만들어져 그 후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까지 480년 동안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장소였던 증거의 장막과 함께 있으면서도 우상을 숭배하였다.  7장 48-50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에 대한 잘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