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8의 게시물 표시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히브리서 4장 1-2절『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바로 왕의 압제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워 할 때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그 고기를 먹은 후에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넜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은 애굽으로 부터 나올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광야에서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3장 16절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광야에서 이들이 복음 전함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주님이『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맹세하신다. 애굽에서는 히브리 백성의 죄를 묻지도 않으시고 넘어가셨다. 애굽에서 하나님이 노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나 광야에서 매일 맛나를 먹으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사는 동안에 주님이 노하시고 맹세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다. 광야에서 믿음을 화합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13장 30-31절에서『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외친 것이다. 그랬더니 14장 1절에서『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들은 백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백성들이 믿음을...

금보다 더 귀한 시련

베드로전서 1장 23-25절『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성경 말씀이 왜곡되지 않고, 영원히 변치않는 말씀이 심겨질 때 사람들을 거듭나고 변하게 된다. 이 땅에서는 무엇인가 소유하고, 이루는 것이 기록되거나 남게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하나도 기록되거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영이 비워져야 천국이 임한다. 사람들의 영에 세상의 기준으로, 세상의 것으로 가득차 있다. 아무리 오래살고, 아무리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든든하게 여기는 것들은 죽음이 눈 앞에 올 때 주님의 나라에는 하나도 계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식을 많이 쌓은 것, 재물을 많이 모은 것들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분명해진다. 지옥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 외에는 사실 이 세상에서 열매라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잃어버린 영혼은 구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다가 이 세상을 끝내면 주님이 무엇이라 말하실까? 우리의 시각을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옮겨야 한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하고 선명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빛에 있으면 천국이요, 어두움에 있으면 지옥이다.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있으면 천국, 세...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

빌립보서 3장 9절『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라』처음에 교회에 나가면 예수를 믿으라고 하며, 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다.『내가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믿음에 해당한다. 하나님으로 부터 내려온 거듭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베드로가 예수님과 삼년간 같이 다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배우고서도 얻지 못한 믿음이다. 베드로가 믿었던 믿음은 육신으로 믿는 믿음이다. 베드로는『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지만 거듭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 사람들이 믿는 믿음이 내가 믿는 믿음인지, 하늘로부터 내려온 믿음인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평생을 성경을 붙잡고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 주셨는데, 그들은 메시야를 죽였다. 오늘날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찾고 예배한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예수를 죽이게된다. 또한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교회를 만들려고도 노력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을 얻으려면 예수를 먼저 얻어야 한다. 예수를 얻지 못하고 예수님을 통해 의만을 얻으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를 얻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길 외에는 길이 없다.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으면서 예수님으로 부터 보혈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죄를 사하심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한다.『연합된다』는 말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혔지만 바로 죄 덩어리인 내가 못박힌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못박힌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만 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0-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니고데모가 주님께 왔을 때 말씀하셨다.『네가 위로부터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사단의 모조품이 더 많다. 성경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물어본 것이다. 『 너희들 안에』라는 말은 with in you. 믿는 사람들이 함께 거할 때『그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한 개인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지만, 누가복음 17장 20-21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인 구원과 관계되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서『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외식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종교인에 불과한 자를 말한다. 무리 수만명이 모인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무리가 수만명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하지 않고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바리새인의 누룩 외식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다. 29장 29-32절에는『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도록 구해야 한다. 이 세상...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사도행전 17장 30-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 하니라』마귀는 광명한 천사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기록된 말씀 외에는 없다. 사도바울이 철학자들이 모이는 아테네에서 설교하였는데, 설교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앞 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는데,『창조하신 일 가운데 누구나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에게『회개하라』고 했다.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의 시작은 회개다. 예수를 믿지 않다가 믿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설교되고 있는 내용들 중 상당 부분이 구원할 수 없는 플라시보(위약)다. 주님이 구원받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느니라』회개해야 주님이 믿음을 주신다.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즉 택하신 자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교회에서는『부르심을 받으면 다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택하심을 받는 사람은 적다. 구원의 믿음은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의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이다. 교회 처음 나와서 『오늘부터 예수믿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받는 믿음이다. 변화받는 믿음은 부모로 부터 받은 그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 다른 생명이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생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갈라디아서 6장 7-8절『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십자가에 주목하다가 시간이 흐름으로서 율법에 주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이것이 뒤바뀌는 시점이 바로 열심을 내어서 스스로 잘 믿는다고 생각될 때이다. 스스로 쌓아둔 것을 주님이 거두어 가신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와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빛과 어두움처럼 분명하게 드러난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사사로운 지혜를 사용한다. 하늘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4장 22-23절에서『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약속으로 난 자를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라고 했다.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육정)과 함께 하다가 모든 것을 빼앗긴다. 그 다음은 다메섹의 고향 사람 엘리에셀을 말했는데, 하나님은『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계집종으로 부터 이스마엘을 낳는다. 창세기 16장 2절에서『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데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이 사건이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떠난지 10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10년 동안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고, 전쟁도 이기는 체험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이다. 아브람이 75세에 하람을 떠나서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람의 몸이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13년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17장 1절...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않는 자들

요한계시록 21장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주님은 천국과 지옥을 만드실 만큼 의로운신 분이시다. 왜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시는가? 의롭기 때문이다.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는 자는 의에 거하는 바, 그래서 성경은『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주의 나라와 사랑을 구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말하는 것은 사랑의 아버지이지만 아들은 사랑의 아버지를 버릴 만큼 탕자라는 말이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인간이 돌이켜지는 것이 아니라 의의 하나님이 계시될 때 인간이 사단에게 속았던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지옥에 보내는 첫번째의 그룹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두려워하는 자들을 주님은 위로하지 않으신다. 잠언에 사람을『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걸리거니와』라고 했다. 속박에 걸린다는 말이다. 사람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편강도가 좌편강도에게『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한 말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제자들이 두려워 떨었다. 예수님이 그 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도 두려워서 떨었던 것이다.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도 주님은 주무실 수 있다. 주님이 찾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제자들은 풍랑에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배가 가라앉고 가라앉지 않고는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 즉 죽고 사는 것은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를 깨울 때까지 주무시는는 것이다. 인생의 배에 풍랑...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한복음 6장 60절에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라고 제자들이 말했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55-57절에서『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어렵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전체에서 짐승의 피를 마시면 안 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르는데,『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수군거리는데, 예수님이 63절에서 다시 말씀하셨다.『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니고데모에게『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했을까? 오늘날도『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라는 등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했더라도 예수를 따르는 자가 있고, 어렵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 그냥 어려운 말은 제쳐두고 자신이 믿기 쉬운 말을 선택해서 구원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65절에서 다시 말씀하신다.『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사람들은 요한복음의 이 말씀보다 마태복음의『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에 익숙하다. 요한복음과 마태복음 두 가지가 왜 서로...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변화다

솔로몬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공과 행복이 보장되었으며, 명예, 부, 권력, 지식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전도서를 쓰게 되었다. 전도서 1장 2절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다. 그리고 1장 7절에서『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이 말은 자기의 고백이다. 그는 명예, 부, 권력, 지식 모든 것을 자기를 채우는데 사용했다. 그런데 그의 가슴 속에 들어온 것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우상은 나쁜 것은 우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우상이 된다. 대부분 부모에게는 자녀가 우상이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우상이 된다. 성공을 위해 가정을 돌보지 않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보다 높아진 모든 것은 우상이 된다. 우상숭배가 헛되다는 것을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게 주님보다 높아져 우상이 되면서, 그것이 사람들을 허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이사야서 40장을 인용하는데,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내용이다.『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데, 사람의 성공과 행복이 그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람들을 허무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꼭지점처럼 성공이건 행복이건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서 행복할 수 있다. 그 밑에서 올라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슬픔과 좌절이 된다. 서로 다 함께 행복이 아닌 것이다. 대개 다른 사람의 슬픔과 좌절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지만 그런 행복과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천국에는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고, 내가 기쁜 것이 남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이 천국의 것이다. 천국의 것은 영원하다. 그런데 그런게 이 세상에는 없다. 남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사도행전 26장 17-21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사도행전이 거의 마치기 전에 아그립바 왕에게 다메섹에서 들은 음성을 간증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한 사정을 말하고 있다. 회개없는 믿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 사도바울이 들은 음성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이 말씀의 전제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사단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왕의 백성이었던 히브리 백성이 자기네 힘으로 애굽을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짖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주셨다. 영접기도는 가짜다.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다. 세상의 노예인 것이다. 세상으로 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다. 히브리인들의 육신은 바로왕의 진노 아래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유월절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바로왕의 진노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단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의 진노였다.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놓이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구원은 죄를 사함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2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오늘날은 이해되고 검증되는 것 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시대다.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영을 흙 속에 넣어서 사람이 되게 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결과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면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난 것처럼 죽은 영이 부활하여 살아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뿐이다. 사람들이 예수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 구원받는 것이다. 베드로는 삼년 동안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랐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므로 그물이 찟어질 만큼 잡혔다. 장모의 열병도 즉시 나았다. 시작부터 기적을 체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예수님으로 부터 배웠다. 예수님이 물었다.『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믿었다. 삼년 동안 베드로는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 땅에 내려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까지 들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걸었던 자였다. 베드로의 경험은 자신의 이성을 뛰어넘는 영적 능력을 체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베드로가 체험한 모든 것이 구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날 전도를 할 때『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아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만 구원받는다. 그래서 구약시대가 끝나는 시기가 예수님이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까지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도 구약성경을 따...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신명기 8장 2-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보면『두려워 말라』라고 하시는 말도 있고,『두려워 하라』는 말씀도 있다. 시험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고, 『시험한다』는 말씀도 있다. 성경을 보면 분간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주님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애굽에 살면서 가나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이 땅에서의 승리였다. 가나안에 입성은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왕 밑에서 힘든 생활을 했다. 애굽 사람들은 뱀신을 믿고 있었다. 파라오의 이마에는 코브라가 있다. 애굽은 사단의 힘으로 부강해진 나라였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노예와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단의 힘으로 부요한 자들이 가득 잡고 있는 것이다. 그 곳에서 성도들은 겨우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주 께 부르짖는 삶인가, 세상을 즐기고 있는 삶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성실함 만으로는 살 수 없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단에게 송두리째 주어서 악을 행하는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의 힘으로 부요한 자가 온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힘들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성실함 만으로 안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삶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 애굽에서 부르짖을 때 주님이 건져내시는데, 주님이 창조하시는 이유를 회복한다.『내 백...

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디도서 1장 1-3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사람들은 입으로 전하는 전도의 복음보다 영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더 좋아할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하신다. 주님이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셨다.『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핍박하느냐?』『주여 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직접 말했다. 그리고는 앞을 볼 수 없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너에게 이를 사람이 있다. 그에게 들으라』그리고는 전혀 모르는 아나니아를 보내신 것이다.『그에게 들으라』라고 말한 것이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신다. 사람이 얼마나 교만한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고 한다. 주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낸다. 사도행전 10장 4-5절에서『고넬료야 너의 구제와 너의 기도가 상달되었다.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고 그에게 들으라』사도행전에는 성령께서 지시하시고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말한다.『내가 보내는 그 사람에게 들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안 믿는다. 들리지도 않으면서 성령께 듣겠다는 말이다. 그게 교만이다. 주님은『너희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제자들이 나중에『누가 크냐』외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주님이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내가 너희를 보내노니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그 주님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병들었을 때 길에 있을 때 내게 오지 않았다』『우리가 언제 안갔습니까?』『너희 중에 지극히...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갈라디아서3장23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믿음이 하나님으로 부터 와야 된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서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 십자가에 죽었다가 정말 부활했는지 논리적으로 증명하면서 설명을 잘 하면 사람들이 믿기로 결심하여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그래서 이렇게 믿으면 천국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다. 인간 속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나올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선언은 의의 전파자 노아, 당대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가 120년간 의의 도를 전해도 다 일치하여 사양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노아와 그 가족 7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게 성경의 인간에 대한 선언이다.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왕이 그 아들 혼인잔치를 예비해도 다 일치하여 사양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잔치를 다 사양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다. 주를 찾는 자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편리한 기독교는 다 나름대로 주를 찾는데, 주님이 안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를 찾지만 주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주님은『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두움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선언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사람들이 혹 할 수 있는 잔치와 같은 말들을 한다.『이 교회 분위기 좋고, 내용도 나에게 딱 좋네』라고 말이다.『나도 이제부터 믿기로 해야지』라고 진지한 마음으로 주를 입으로 시인하고 믿기로 하면, 그것이 마치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났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게 인류 최대의 미혹이다. 성경에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보자마자 엎드려 절하면서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니다』라고 말했다. 누가 알려주었는가? 귀신이 알려준 것이다. 귀신도 가르쳐 주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우리는

로마서 6장 3절 에서 사도바울이 질문을 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바울의 서신이 일곱 개인데,『성령세례를 받으라』라는 말이 없다. 다 물세례가 무엇인지를 설명을 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축복과 성령충만에 빠져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물세례를 설명하고 있다. 물세례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 만이 구원의 시작이다. 물은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고 인정하여, 죄를 씻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기 전에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집을 떠났지만 친척인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하나님은 믿어는져도, 온전한 순종은 나올 수 없다. 아브라함도 순종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아 방언을 하고, 천사의 소리를 말하면 대단하게 여겨지고 구원받은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육적 죽음의 회개가 있는가 이다. 회개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전쟁도 이기고, 멜기세덱(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신령한 영적인 존재를 만났지만 그가 떠난지 11년 만에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

일반으로 얻은 구원

유다서 1장 3절『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동일한 구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구원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구원은 동일하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기 직전 시간이 얼마 안남은 우편 강도나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을 알고 스스로 자결하려고 하는 빌립보 간수에게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을 듣고자 했던 니고데모에게나 구원은 동일하다는 말이다. 삼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제자 베드로에게나 주님이 모르는 사람에게나 구원의 적용은 동일하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자는 구원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은택을 받은 자가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과 자주 안 맏났던 사람에게는 구원이 어렵고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교회를 수 십년 동안 다닌 사람이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보다 구원의 기회가 더 빠를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다가 common salvation을 왜 쓰려고 했는지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는 믿음을 내가 노력하고, 찾는다고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시간 낭비를 한 셈이다. 믿음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해서 찾는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간절히 찾으면 얻는 것인줄 생각하고 있다. 구원받는 믿음은 주님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단번에 주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절히 노력해서 얻으려고 할수록 이삭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얻는다. 그러나 모두에게 동일한 구원을 위해서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실 믿음을 위해서 힘써 싸워야 한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열심히 ...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아라

사도행전 3장 19절『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사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에 주 앞으로 부터 이를 것이요』베드로가 오순절이 지난지 얼마 안되어서 말하고 있다.『회개하고 돌이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회개하라는 능동적인 말이지만『돌이켜』는 수동적인 말이다. 회개하면 우리가 돌이켜진다는 말이다. 이『돌이켜』가 바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이『돌이켜』라는 말이 바로 2장 38절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죄사함을 받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 즉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성령은 방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우리의 내적인 역사를 말한다. 즉 거듭나야지만 우리 안에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거듭나지 못한 믿음은 환경은 변화시킬 수 있으나 내적 변화는 일어나지 못한다. 성령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만 한다. 회개할 때 우리가 거듭나게 된다. 그래서 거듭나는 것을 세례라고 말한다. 2장 38절에서『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로마서 6장 1-3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는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10장에서『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마태복음에서『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와 서로 상치되는 것 같다.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예언하며 귀신을 쫒아내며 많은 능력을 행하고, 주여 주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경험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나는 너를 모른다 나를 떠나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17장 16-18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이 이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라는 도시의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졌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어서 이렇게 거룩한 마음이 생겨야 한다. 바울은 그 때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시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철학자들과도 쟁론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다 이방인들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에서는 재물이라는 우상이 가득하다. 28-29절에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주님은 어떤 형상을 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형상을 만들면 그 곳에 신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런 존재다. 인간은 새긴 우상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주님은 가까이 있지만 주님은 영이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것에 있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계시지 않으신다.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이며, 종교에 불과하다. 주님은 회개한 성도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구약시대 성막과 성전을 주셨다. 이것은 하늘의 모형이다. 주님이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에 거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나라에서 드려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