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0의 게시물 표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보낸 이유

창세기 8장 1-6절『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사십일을 지나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끝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궁창위의 물을 아래로 쏟아버리고, 다시 그 물이 되돌아갔다는 의미다. 궁창 위의 물이 다시 돌아가고 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던 그 때처럼 궁창 아래의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된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보낸 것이다. 창세기 8장 7-10절에서『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내 놓으매』를 히브리어로『샬라흐』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으로부터 세상에 내보내는 것도『샬라흐』다. 창세기 3장 23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즉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으로 쫒겨났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여기서『보내신』 이라는 헬라어는『펜포』라는 단어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궁창 아래의 물(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율법)에는 ...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17절『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다. 처음부터 빛과 어둠을 등장시킨다. 이 세상의 어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빛되심을 대비시킨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빛의 능력으로 어둠이 물러가는 그런 모습을 그려낸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그리고 1장 9-12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그러나 사람들은 3장 19절에서『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과 어둠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창세기1장 3절에서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은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어둠이 없는 빛이다. 요한1서 1장 5절『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백마타고 오시는 주님

(요한계시록 19장 11-13절)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을 기록한 서신이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환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모든 악을 이기신 부활 사건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다.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살아가던 AD. 90년대에,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반대로 미혹과 협박을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손해 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환상, 즉 현재 일에 대한 환상이다. 이 환상에는 경고와 격려가 혼재되어 있다. 세 번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최종적 구원과 심판에 대한 환상이다. 이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이미 이루어진 과거가 된 환상도 있다. 예를 들면 바벨론인 로마의 패망과 심판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환상이 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잔존하는 모든 악을 소멸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일은 아직도 미래의 일이다.  19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환상이다. 19장에는 크게 두 종류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환상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결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사건은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치 혼인잔치와 같은 일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된다. 한 부류는 장엄하고 흥겨운 노랫소리...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장 1-3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11장까지는 복음의 내용, 즉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교리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12장부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즉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 대원칙이 있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중 네 가지 기본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서로와의 관계, 원수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육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육의 마음을 부인하고 영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13장에서 바울은 더하여 세 가지 관계 즉 국가와의 관계, 율법과의 관계, 주의 재림의 날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바울은 먼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명령을 말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권세들은 권력을 잡은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한다. 복종한다는 말은 반드시 그 아래에 거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위에 있는 자를 위에 있는 자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도 질서를 따라야 하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도 깨달아야만 ...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창세기 2장 21-24절『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하나였다. 아담이 하와가 분리되기 전에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아담은 남자로 태어났는데, 여자인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분리되기 전의 사람은 완전한 하나가 된 존재라는 것이다. 분리된 이후에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사람)과 하와가 분리된 아담(남자)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이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다.『이러므로』는 원래는 하나였으므로, 한 몸을 다시 이루라는 것이다. 남자가 된 아담은 죄를 짊어지고 이 땅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그리고 여자는 그리스도를 떠나 스스로 자기의 의를 이루어보려는 하나님을 떠난 영들이다.  이 말은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도 언급된다.『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여기에서 사람은 남자를 의미한다. 번역을 남자로 했어야 했다. 영어 성경에서 사람과 남자를 man으로 혼용하므로 번역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교회는 아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남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아내라는 표현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모든 영들이 들어오고, 마지막 아담 안에서 택한 영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 아담은 죄...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가복음 1장 21-28절)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귀신들린 사람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를 말한다. 그래서 사탄의 종이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쫒아낸 것에 대해서 의미를 깨닫지 않으면,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은『너희들이 모두 귀신들린 자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므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귀신을 쫒아내므로서 병이 떠나가고, 맹인이 눈을 뜨고,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귀신은 영이다. 귀신이 영이므로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귀신, 마귀, 어두운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모두 사탄을 총칭하는 말들이다. 사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다. 귀신이 사람 속에 침입했다가 나가면 쉴 곳을 찾는다고 했다. 물없는 곳을 찾는다. 물 없는 곳은 광야를 말하며, 세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한다.  요한복음 9장 39-41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이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누가복음 5장 1-6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이 말을 두고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가복음 1장 17절에서도『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그런데, 단순히 전도를 해서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부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다면, 어디서 낚아야 하는가? 바다는 어디를 말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바다를 이해하려면, 인간들이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이사야서 42장 7절에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는『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자를 말한다. 왜냐하면 흑암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세상에 육체로 오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린 것을 말한다.  감옥에 대해서 시편 142편 ...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

(누가복음 23장 27-31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가 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게 되었다. 이미 결박당하신채 이리저리 끌려 다녀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심문을 받으시며 많은 매를 맞으셨다. 기운이 다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실 수 없게 되신 예수님을 본 로마 병사들은 가까이에 있던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하나를 붙들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구레네는 예수님 당시 이집트의 서쪽에 접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영토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고 지중해 해안 가까이 있던 그 주된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정착해 살고 있었다. 시몬은 아마도 구레네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결박을 당하신 채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 십자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호기심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그를 조롱하며 그가 죽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쫓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그가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인들도 있었다. 그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

천국에서 나의 상급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0장 13-16절에서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에도 상급의 등급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십일조나 건축헌금들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한다. 천국을 이 세상에서 한 행위로 연결시키려고 한다. 창세기 1장 15절에서『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했는데, 이 큰 상급은 바로 하나님을 나타낸다. 히브리어로『사카르』라고 하는데 사크는 보수 즉 일한 대가이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한 그 상(헬라어: 미스도스)도 바로 창세기 1장 15절에서『상』을 말하는 히브리어의 사크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핍박에 대한 대가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바로 영생이다. 영생에는 등급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한 데에 대한 대가가 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것은 상이고, 예수를 믿지않고 그 대가로 받는 것은 벌이다. 벌도 예수 안믿고 제멋대로 산 대가인 것이다. 성경에서 기업이나 유업으로 표현한 것도 있고, 사도바울이 달음박질에서 1등을 하는 것이라는 표현한 것도 있지만 천국에서의 상과는 좀 다른 의미를 ...

내가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장 16-18절『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죄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히 하지 않으면 구원에 대해서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죄를 범하는 자가 죄의 종이라고 말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어떤 부분은 다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8장 31-34절에서『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대개 세상에서 지은 죄를 두고 말하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죄인이 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죄를 의미하며,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이 말씀의 의미는 죄에 대해서 인간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인 옛사람이 죽어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인양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을 예수님을 닮아가는 마음의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예수님이 거듭나지 않...

떡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

마태복음 15장 32-38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에 대한 말씀이 있다. 다섯개의 떡은 헬라어로 알토스, 히브리어로는 네헴(떡: 진설병)이라 한다. 하나님이 계신 법궤 앞에 금으로 만든 상이 있는데, 그 위에 진설병이 놓인다. 진설병은 떡이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출애굽기 25장 30절에는『상 위에 진설병을 두고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진설병 12개를 놓는데,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 48절에서『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고 하셨다. 이 떡은 오병이어에서 나오는 떡과 같은 말이다. 떡 다섯개 즉 말씀 다섯개는 모세오경을 말한다. 즉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개는 모세오경(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스투스라 하며,『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원』이라는 말씀을 포함한다. 물고기는 요나의 표적을 나타낸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심을 나타낸다. 물고기가 두 마리 있다는 말은 초림과 재림을 말한다. 떡 다섯을 먹고 남은 열두 바구니가 남았는데,『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말은 이스라엘(12지파)이 말씀을 들었지만 진리를 모른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시 재림 하실 때 이스라엘이 바구니에 남아 있는 떡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때 때 이스라엘이 깨닫게 되고 떡을 먹게 되는 것이다. 먼저 먹은 자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종말에 대한 말씀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종말에...

들여보내고 여호와께서 그를 닫으시니라

창세기 7장 16절『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암수 둘로 갈라진 생명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세상에 온 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영이 있는 육체들이 둘씩 방주에 들어간 것이다. 창세기 1장 22절에서『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늘과 물에 있는 생명체들과 같이 땅에 있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대를 이어서 생명을 이어간다. 이 땅의 법칙을 통해서 하늘의 법칙도 깨달아라는 것이다. 땅의 형체(육의 몸)를 통해서 하늘의 형체(영의 몸)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바닷물(하나님 말씀)에 충만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모든 생명체에게 같은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8장 16-17절에서『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암수에게 말씀해주셨다.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된다. 남자와 여자는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떠난 영들을 찾아와 그들과 함께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의미를 갖는다. 고린도전서 14장 33-34절에서『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남녀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여자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성도다. 즉 성도...

탕자의 비유(맏아들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마지막 말씀이다. 동생에 대해서 큰 아들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회개의 말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만이 언급된다. 이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예화로서 유명한 말씀이다. 영접 기도처럼 탕자의 비유가 많이 언급되어진다.  탕자의 비유를 하게 된 이유는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15장 2절에서『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므로 예수님이 3-4절의 말씀을 하게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찾으면 이웃과 친구를 불러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

예수 열심히 믿고 지옥가는 사람들

로마서 8장 1-4절『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을 따르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영(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으므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가 구원받는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육이 아니라 영으로 성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영이 죽은 자들은 성령을 따를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난 영이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다. 구원은 육이 아니라 영에 대한 이야기다.  교회 사람들은 몇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예수님을 믿어서 교회를 다니면 구원받는다』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오해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 것에서부터 예수님이 믿는 자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까지 다양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교회가 된다.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할 때,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진다. 그래서 성도들이 모인 그곳에 교회가 이루어진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건물에 모여있는 성도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아무도 없는데, 십자가를 세워놓았다고 그 건물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구원은 예수님을 믿...

열처녀 비유

마태복음 25장 1-2절『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예수님이 본문의 말씀을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연결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 성경의 원문은 장과 절이 없지만, 16세기 경에 들어와서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장과 절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원문의 입장에서는 24장과 25장은 연결되어 있는 내용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25장에는 열처녀의 비유 뿐만 아니라, 달란트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도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그 대상은 달란트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의 대상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므나의 비유에서와 같이 열(10)이라는 숫자는『완성, 충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열처녀는 모든 처녀를 의미한다. 처녀는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그래서 처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 교회 신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 신부에게 주는 포도주를 마시는 자가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혼인 전통에서도 등장한다. 예비 신랑이 예비 신부 집에 방문해서, 포도주를 잔에 따르고 예비신부에게 주는데, 그녀가 마시지 않으면, 혼인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 예수님이 주는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 해당한다. 즉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열처녀는 모두가 예수님을 주로 생각하고 있지만, 포도주를 마신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밖에 없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마태복음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장 23-27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장 이전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이 소개된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도『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이렿게 묻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믿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는 믿음은 나의 죽음과 결부되지 못한다.『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그 문이 좁고 협착해서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찾는 자도 적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만 이 문을 찾게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좁고 어렵기 때문에 이 문을 싫어한다.  문이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평생 예배한다고 반드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제자들도 되지 않았다. 구원이 쉽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것이다. 구원이 쉬워보이는 길은 멸망 길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는『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셔도, 사람들 스스로 회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7장 1-5절『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장의 표현과 7장은 차이가 있다. 6장에서는『아들과 아내와 며느리』라고 했으나 7장은『네 온 집』이라고 표현했다. 집이라는 의미는 좁은 의미에서는 가족의 단위를 두고 말하지만, 넓게는 국가(이스라엘)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방주는 대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5장 32절에서『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11장 10절에서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성경의 근거로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아르박산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홍수가 났다.  홍수가 거의 1년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홍수 후 2년에 셈이 아르박산을 낳았다고 말한다. 사실상 노아가 셈을 502세에 낳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아가 500세 때에는 셈을 낳지 않았는데, 낳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Noah was five hundred years old: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kjv) 오백이라는 말의 의미는 오(5)는 은혜를 상징하고, 십(10)은 은혜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고, 또 다른 십(10)은 은혜가 성취되어 졌다는 의미다. 셈 함 야벳은 노아가 500세에 되던 해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날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즉 셈 함 야벳은 노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기 38장 1-7절『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38장 1-7절에서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는 것에 대해서 욥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욥이 26장 7절에서『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라고 말한다. 욥이 26장에서 한 말에 대해서 하나님이 38장에서 욥이 잘못 말한 것으로 질책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욥이 42장 3절에서 잘못 말을 한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실 때는 욥과 친구들과 변론하는 마지막쯤 되었을 때다.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의 핵심은『욥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내용이다. 세명의 친구 중에 마지막으로 엘리후라는 친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할 때,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하나님 말씀은『네가 창조에 대한 내용도 제대로 알지도 모르면서 말했다』는 것이다.  욥이 42장 3절에서『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곧 욥이 스스로 잘못되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욥이『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라고 말했는데, 하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장 1-3절『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3장은 에덴동산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4-11장까지는 에덴동산의 사건 이후 인간들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12장 이후부터는 한 민족을 통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을 보여주신다. 아브라함에 대한 삶과 여정은 열네개의 장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에 대한 설명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은 마태복음이 아니라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이 모든 인간들의 대표(모델)라고 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열세개의 장을 할애하는 요셉도 아브라함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요셉은 변화된 아브라함의 모습인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8장에서『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다. 선지자들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가 된다는 의미다. 거듭난 성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속에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마태복음 24장 37-39절『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은 재림 때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노아 시대 세상죄가 관영하여 홍수로 멸망당하였으므로, 예수님 재림때도 이와 같이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홍수 전에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은 일상생활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런 일상 생활 가운데,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자였으며, 반드시 돌아가야 할 자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어야 한 것이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 할 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를 이루어보려고 하다가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약속의 씨를 바라보아야만 했는데, 아무도 그렇게 그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오직 노아와 가족 8명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에 들어갔다는 말씀이다. 창세후에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의 씨를 바라보다가, 점차 결혼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자, 약속을 다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창세기 6:2)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다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없도다

이사야 29장 13절『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15장 8-9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교훈을 따른다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말 중에『고르반』이라는 것이 있었다.『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다. 어떤 일이 있던지 유대인들이『고르반』이라고 말을 하기만 하면, 다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으로 이어져 왔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유익과 편리를 위해서 악용되어 왔던 전통이었다.  장로들의 유전 가운데,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씻어야 하는데,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2절에서『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도,『고르반』이라고 말만 하면 지킨 것으로 스스로 간주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실적으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장 17절『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창세기 2장 1-3절에서『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안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안식에 있는 것이다. 즉 내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서『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안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즉 첫째 날에서부터 여섯째 날에는 안식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왜 안식하지 못했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는 사탄과 영들로 인해서 안식이 깨어진 것이다. 그들을 가두기 위해 물질세계를 만들어 그들을 그곳으로 내보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6일동안 창조의 일을 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세상 창조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인 것이다.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이 말씀은 하나님이 비록 직접 자기의 일로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세상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세상 창조의 일을 마쳤으므로 세상에 들어간 영들에게 너희들이 알아서 선을 이루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표현이시다.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는 것과...

부자와 나사로

누가복음 16장 19-31절『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므로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한 부자가 있어』부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부자를 말할 때, 세상의 부자라는 말이 아니라,『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

창세기 14장 17-20절에서『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얻은 것은 전쟁 중에서 얻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원문에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되어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과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십일조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율법에서 십일조를 정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십일조가 있었으므로, 십일조는 교회에 바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멜기세덱은 히브리서 5장 11절에서『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멜기세덱을 살렘왕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7장 2절에서『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그리고 이사야 9장 6절에서는『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결국 살렘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즉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7장 3절에서는『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장 18-22절에서『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방주는 이후 성소와 성전으로 나타난다. 성소 안에는 휘장이 있어서 지성소를 구분하고 있다. 이 성소가 곧 방주와 같은 개념이다. 재료와 치수가 그 같은 의미를 말해준다. 방주의 재료는 백향목(잣나무, 고페르)으로 만들어졌다. 히브리어로 백향목은 고페르, 백향목의 진은 고피르트 라고 한다. 이 고피르트는 속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고피르트를 백향목 나무의 안팍으로 칠한다는 것은 방주가 대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칠하다(카파르)는 의미는『덮다, 속죄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방주는 속죄제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창세기 6장 15절에서는『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규빗은 길이를 측정하는 단위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 말씀의 잣대라는 의미도 있다. 삼백에서 삼(3)은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성취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열의 열(10)은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십에서 오(5)는 은혜를 상징한다. 사(4)는 고통과 죽음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끝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그 은혜가 바로 율법이다. 그래서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이다. 삼십(30)도 삼백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거하면

요한1서 1장 5-10절『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교회 사람들은 이 말을『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에서 악한 행동을 하게되면』 이라고 받아드릴지도 모른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에 대해서 화답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아멘하면서 그것으로 끝내면 안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19절에서『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두렵게 여겨지므로 모세 (율법)뒤에 숨었다.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아멘 하지만, 하나님께 직접 화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 뒤에 숨어서 자기의 의를 쌓는 것 뿐이다.  율법에 갇힌 자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알아서 믿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을 찾고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전하지 않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빛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