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0의 게시물 표시

두 맹인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마태복음 9장 27-31절) 불쌍한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이 메시아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도 그냥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도 이들이 집안까지 들어왔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고 말했다. 그들이 『주여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 것이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믿음대로 된다』고 하면서 사람의 믿음을 강조한다. 병고침을 받는 믿음이 구원을 얻는 믿음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것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회개하지 않고 단순히 병을 고치겠다는 믿음으로 와서 병의 고침을 받고 갈 수 있지만 그것은 구원과 직결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자 정말 눈이 뜨여졌다. 그런데 예수님의 엄히 경고하셨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렸다. 먼저 왜 고침 받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다. 이사야의 42장 7절의 예언대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장 23-25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고 말씀하셨다.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with)과『마누』(우리와:us)와 『엘』(하나님:God)이 결합된 단어다.『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본래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의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품속에 한 영이 있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그 영이 하나님이시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하나님의 품속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까 그 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므로 그 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그 존재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를 한다면 『영』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말씀하시는 그 형상은 영을 말하는 것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이어서『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바로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기 전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첫 사람 아담인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9-13절)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세리인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라고 예수님을 비난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오면 먼저 자기들에게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불만이 되었다. 자기들은 죄인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인정받는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누가복음 15장 1-7절에서 한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이스라엘이다. 이 양들을 두고,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마리(죄인들)를 찾으러 다니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어린양의 비유를 하신 배경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의인들인데, 메시야가 오면 당연히 자기들에게 올 것이라고 확신...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태복음 9장 14-17절)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적인 경건 중의 하나가 금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 온 백성으로 금식하도록 명하셨다. 그 날에는 제사장도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으며, 향을 피우고 피를 뿌리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더불어 온 백성도 먹기를 그치고 함께 나아가야 했다. 또 어떤 일로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질 때면 그들은 온 종일 금식하며 울어야 했다. 자기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며 먹기를 그치고 울어야 했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금식의 모습이다. 구약의 질서에 따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은 그들의 경건모습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주님은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기쁨의 혼인잔치가 시작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시므로 금식의 문제에 대해 답하고 계시다.  지금도 구약적인 의미로 금식을 가르치고, 마치 그것이 의의 한 기준이나 되는 것처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복음으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새로운 천을 잘라서 낡은 구멍난 옷에 붙여 짜집기 한 것과 같은 부조화스러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의 틀에 매인 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태복음 3장 13-17절)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장 13-17절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나라를 떠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아들이 되어 율법에 따라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여호와)은 한분이시지만 삼위로 역사하신다. 보좌의 여호와 하나님(LORD),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Lord), 성령이시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보좌의 하나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아들도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의 여호와이심을 요한복음 등에서 나타내신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보좌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예표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처음으로 이적을 한 곳이 바로 가나에 있는 혼인잔치이다. 잔치에는 포도주가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중간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께『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을 하셨다. 집에 들어갈...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장 4절『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진 자의 모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성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성도는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하나님 나라를 상징)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고향 친척 아비 집이 무엇인가? 고향이라는 히브리 원어의 에렛츠는 땅이다. 이 땅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그곳(갈대아 우르)이라는 의미와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이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로 마음을 향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가 되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9-10절에서『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그래서 이 땅에서는 항상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이다. 11장 15-16절에서『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천국을 발견한 자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을 집중해서 천국에 대한 말씀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있는 것들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21-22절에서『예...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장 18-22절)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청년은 주님을 어디든지 따르겠으며,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간청한다. 그는 서기관이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며 정중하게 거절한다. 반면 제자라고 표현된 다른 사람은 집에 부친상을 당한 급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이 당연하고도 급한 부친상을 치르고 와서 다시 따르겠다고 시간을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번에는『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는 말씀으로 부친상을 치를 것을 허락지 않고 계속 주님을 따를 것을 명하신다.  이 두 사람에겐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먼저 주님은 그들의 동기 즉 중심을 보고 계신다. 첫 번째의 사람은 서기관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머리둘 곳』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서기관은 그 동안의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타의 행적들을 보고 듣고 알았을 것이며, 그 마음에 계산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서기관이 생각하기를 이 사람을 따르면 이후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정치 사회 종교적 위치를 고려하여 주님께 따르겠다고 요청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수님께서『머리 둘 곳』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계신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 청년을 자신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지 주님을 위해서 따르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7-12절) 성경 본문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에 붙들고 사는 말씀이며, 크신 은혜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데, 맥락에는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의 끝부분에 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거듭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앞선 말씀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고, 뒤이어지는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과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에게 전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주시겠다는 것이다.『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말씀하셨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4-11절에서『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네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니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43-45절『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회개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성도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전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사명인 것이다.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예수님은 여러가지의 예화로 죽어있던 이웃의 영을 깨우는 것을 설명하셨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서『너희는 빛과 소금이라』,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서『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누가복음 10장 29-37절에서『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말씀이 이웃의 죽어있는 영을 깨우는 일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으로 있다가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악을 행하였건, 선을 행하였건 모두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복귀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로 나뉘어질 것이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안에 있는 자를 박해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러나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들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못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영을 깨워야 하는 사명을 갖게 된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장 1-5절)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자기의 잣대로 쉽게 남을 비판한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그 비판으로 다시 비판을 받게된다. 사람들은 남을 비판할 처지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에게 비판을 한다는 것이 형평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던 이방인이던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인양 이방인을 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6절에서『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을 개로 비유한 것이다.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장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예수님이 놀라신 믿음

(마태복음 8장 10-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왔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여 저의 하인이 병들고 괴로워하오니 고쳐달라』고 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는데,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다』고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했다. 이방인 백부장의 무엇을 보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는 것인가?  백부장의 믿음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믿음이 이방인 백부장에게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친히 온 것으로 되어있지만, 누가복음 7장1-10절에서는 자신이 감히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도 없는 것으로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들을 대신 보낸 것이다.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이 이방인이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유대인 회당도 지어준 사람이기에 이 사람의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또 사람을 보낸다. 자신이 직접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는 이유는『제가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어서 장로들...

눈은 몸의 등불이니

마태복음 6장 22-24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는 빛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이 있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이 없으면 어두울 것이다. 그 빛이 눈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 눈은 영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이나, 영적인 눈이 열려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영적인 눈이 열려져 있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으나, 어떤 사람은 영적인 눈이 열려져 있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는데, 인간이 물질세계에 살면서 아주 알기 쉽게 해주셨던 것이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무런 의미없이 생각하고, 그냥 빛이 있으니 낮이고, 빛이 없으니 밤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 동안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았으며, 하나님이 빛을 만들어 주신 것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의 관계를 보면 빛이 오기 때문에 어두움이 물러간다. 어두움이 물러가기 때문에 빛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두움이 오는 것은 빛이 물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빛을 보내주는 해가 가니까 어두워지고 그 해가 오니까 밝아지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이 빛의 진리이다...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창세기 12장 5-6절『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의 시작과 종말을 발견해야만 한다. 아브라함이『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 땅을 지나가는 것이다. 나그네처럼 잠깐 들렀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지만 그 땅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나라가 참 가나안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 가나안은 지나가는 (pass over) 곳이지 종점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지나가는 삶이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남방은 헤브론이다. 가나안을 통과하여 헤브론으로 간 것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여정이 이렇게 아브라함의 여정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구원의 약속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일깨워주신다.『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찾아간 곳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른 것이다. 모레는 히브리어로 무당, 점쟁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상수리 나무는 가나안의 문란한 종교의식을 상징한다. 호세아 4장 12-13절에서『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곳이 이방 ...

무지개 언약

창세기 9장 14-17절『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무지개 언약은 물로 다시는 심판하지 않고, 말씀과 성령의 불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이 때 물은 바로 노아의 홍수와 같은 물이다. 노아시대에 살았더라면 이렇게 죽었을 자라는 것을 믿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말씀과 성령으로 심판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무지개는 둘째 사망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증표인 것이다. 둘째 사망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세상(물)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창세기 6장 3절에서『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여기에서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영원히』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기 전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승천하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말씀과 성령으로 불태워버리시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꾸실 것이다. 성령으로 불태우는 것이 바로 둘째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은 영이 죽은 육신의 자들이다.  빛은 색깔이 없지만, 빛이 물체에 반사되면서 색을 나타낸다. 빛이 비춰졌지만 반사되지 않으면 어둠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 31-34절『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염려와 두려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한다. 두려워하는 것은 심판받을 죄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는 불못에 들어간다고 요한계시록에서 말한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주님은 천국과 지옥을 만드실 만큼 의로운신 분이시다. 왜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시는가? 의롭기 때문이다. 지옥에 보내는 첫번째의 그룹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주님은 위로하지 않으신다. 잠언에『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걸리거니와』라고 했다. 속박에 걸린다는 말이다. 사람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편강도가 좌편강도에게『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한 말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제자들이 두려워 떨었다. 예수님이 그 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도 두려워서 떨었던 것이다.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도 주님은 주무실 수 있다. 주님이 찾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제자들은 풍랑에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주인이라...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마태복음 2장 1-6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 땅에 내려 오셨다『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가 5:2)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예비하셨는가? 베들레헴은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벧』은 집, 『레헴』은 떡을 의미한다. 베들레헴은『떡의 집』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떡이기 때문이다.『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51) 베들레헴의 첫성탄은 축제가 아니라 비극이었다. 헤롯이 세살 아래 모든 사내 아이를 다 죽였다. 모세가 태어날 때, 모세가 유대민족의 구원자임을 마귀가 알고, 바로왕을 시켜서 아기 때부터 사내 아이를 자 죽인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때 마귀가 알았으며, 헤롯왕을 시켜서 그렇게 죽인 것이다. 세계의 역사상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첫성탄은 통곡 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리아에게도 불안하고 고통의 날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날이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마태복음 5장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세상적인 표현으로『동해보상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동해보복법』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동해보상법』은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의자가 피해를 입은 자에게『같은 수준의 보상을 하라』는 의미가 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말했는데, 이는 피의자에게 하신 말씀인데, 피해자에게 말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드려졌다. 남에게 이를 상하게 했으며, 이를 상하게 한만큼, 보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39절 이하에서 피해를 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피의자의 입장에서, 피해를 남에게 입혔을 때는 그만큼 보상하고, 남으로부터 피해를 당했을 때는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표현이 된다. 가인은 이스라엘,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이방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결국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된다는 표현이다. 가인은 칠배이었지만, 라멕은 칠십칠배라는 ...

시작하였으나 이르지 못하는 구원

히브리서 4장 1-2절『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구원에 대해서『쉽게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우리의 노력으로는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수의 피로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따라서『믿기만 하면 천국간다』고 말한다.『이것을 받아드리고 믿으면 천국간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은1절에서『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했는데,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처럼 기쁨과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 앞의 내용은『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만든 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관계로 격노하셨다』는 말이다. 앞의 3장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이 맹세했다는 말이 나온다. 3장 18절에서『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그래서 4장에서『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기뻐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시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북을 한다. 과거에는 두만강만 넘어면 기뻐했지만, 지금은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히면 끝이다. 두만강을 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은 한국 땅을 밟지 않고서는 안심하지 못한다. 그들의 구원은 북한을 탈출하는 것...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

로마서 13장 1-3절『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각 사람은 every soul(kjv)로 표현되었다. 즉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말이다. 창세기 2장 7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 라는 의미다.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을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 자를 의미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영이 이 세상의 흙속에 들어와서 생명체가 된 자들이다. 결국 각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다.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권세(the power)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즉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칠 수 있는 권세를 주었다는 것이다. 욥기 1장 12절에서『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그리고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핍박했다. 사도행전 26장 10절에서『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누가복음 4장 6절에서도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한 말이다.『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하나님이 사탄에게 일정기간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이 이 땅에 갇힌 것을 인식하...

내가 반드시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창세기 9장 1-6절『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것이다. 방주 안에 있다가 땅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가 이 땅으로 오는 모습을 연상한다. 방주에서 나오는 것은 세상의 첫 창조와 같은 모습이다.『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여기에는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창세기 9장에서는 없다.  그러나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땅을 정복하라는 말 대신에 『너희 손에 붙였음이니라』라는 말이 있다. 창세기 3장 6절에서『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남편에게 『주매』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장 17-20절)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이 땅에 갇힌 죄인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스스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이키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25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전까지는 율법이라는 그물에 갇혀있다. 즉 죄인이 감옥에 갇혀있는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개하는 자의 갇혀있는 그물을 풀어줄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성도라고 일컷는다. 성도가 만일 율법을 따르고 지키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태복음 3장 11-12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이 물에서 세례를 주는 의미는 죄를 씻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받는 세례의 의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 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다. 이때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는 구원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의 세례는 성도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도에게 계시를 주시고 역사하게 만드신다. 성령세례는 성도가 복음을 전하고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힘을 주시는 보혜사, 능력의 세례인 것이다. 성령 세례는 성도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역사하신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으셨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으므로 부활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될 것인데,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던 성도에게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본 자들도 남에게 그 부활의 증거를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세례를 주셨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

무화과나무의 비유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장 29-35절)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다 알게오신다.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님과 온 족속이 다 알게오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님은 휴거를 당하는 자를 말하고, 모든 족속이 보는 상황에서 오시는 것은 7년 대환란 후에 오시는 지상재림인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때 나타날 현상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했지만 거의 2000년이 지나서 이스라엘이 독립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 누가복음 13장 6-9절에서『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창세기 6장 1-13절에서『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쫒겨나서 물질세계에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갇혀진 것이요 최종 심판은 유보되어 있지만 그것은 심판을 받은 것이요, 쫒겨나서 육체 안에 모든 것이 갇혀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은『하나님 없이도 나도 선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해보라고 하나님 나라에서 쫒겨난 것이 천지창조요, 세상에 쫒겨난 상태로 흙이라는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왔으니까 어두운 가운데 탄생한 것이요, 죄악 가운데 탄생한 것이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가 된 것이 천지창조의 요약이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범죄한 자들이 쫒겨나서 어두움 가운데서 죄악된 상태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어진 인생들에게 하시는 말씀은『나 없이 의를 이루어 보라』는 것이다. 해 본 결과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있는 것들, 사람, 짐승, 새 등 모든 것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심판을 받게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하나님없이 살아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없이 살아본 결과 멸망에 이르게 된 결과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율법과 관계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편에서 설명하실 때에는『먹으면 죽는 나무다』라고 설명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는 의미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사단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단의 생각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처럼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7장 1-5절『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장의 표현과 7장은 차이가 있다. 6장에서는『아들과 아내와 며느리』라고 했으나 7장은『네 온 집』이라고 표현했다. 집이라는 의미는 좁은 의미에서는 가족의 단위를 두고 말하지만, 넓게는 국가(이스라엘)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방주는 대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5장 32절에서『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11장 10절에서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성경의 근거로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아르박산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홍수가 났다.  홍수가 거의 1년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홍수 후 2년에 셈이 아르박산을 낳았다고 말한다. 사실상 노아가 셈을 502세에 낳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아가 500세 때에는 셈을 낳지 않았는데, 낳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Noah was five hundred years old: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kjv) 오백이라는 말의 의미는 오(5)는 은혜를 상징하고, 십(10)은 은혜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고, 또 다른 십(10)은 은혜가 성취되어 졌다는 의미다. 셈 함 야벳은 노아가 500세에 되던 해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날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즉 셈 함 야벳은 노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기 38장 1-7절『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38장 1-7절에서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는 것에 대해서 욥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욥이 26장 7절에서『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라고 말한다. 욥이 26장에서 한 말에 대해서 하나님이 38장에서 욥이 잘못 말한 것으로 질책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욥이 42장 3절에서 잘못 말을 한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실 때는 욥과 친구들과 변론하는 마지막쯤 되었을 때다.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의 핵심은『욥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내용이다. 세명의 친구 중에 마지막으로 엘리후라는 친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할 때,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하나님 말씀은『네가 창조에 대한 내용도 제대로 알지도 모르면서 말했다』는 것이다.  욥이 42장 3절에서『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곧 욥이 스스로 잘못되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욥이『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라고 말했는데,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