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두가지 유형의 신앙인이 있음을 발견한다.『하나님이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는 자와『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셨으니』 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를 대속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으시는 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어느 쪽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둘 다 맞다. 그러나 순서가 있는 것이다. 의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의를 놓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사랑만을  말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에서 비춰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진노하신다. 거듭나기 전에는 본질상 모든 사람이 진노의 자녀인 것이다. 하는 모든 인간의 행실이 죽은 행실이다. 진정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의를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것인가?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의 의에 맞추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나님의 의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회개가 무엇인지 깨닫기 때문이다. 회개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칭의가 있고, 성화가 이루어진다.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회개가 안된 것이고, 삶의 열매가 없는 것은 회개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회개를 막기 위해서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회개는 내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회개다. 그러나 현실을 어떠한가? 나를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다.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믿는 자들은 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는 회개하는 자 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회개한 자만이 이 땅에서 성공과 행복을 다 잃어버려도 예수 만을 찾는 자가 될 것이다. 예수가 삶의 방법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예수가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좁고 들어가기 어...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4장 11-12절에『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마가복음 4장 12절 앞에는 네가지 밭의 비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 중에서 첫번째의 밭이 길가 밭인데, 새가 와서 뿌려진 씨를 쪼아 먹었다고 말한다. 새는 마귀를 나타낸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심리학적 이유가 아니라 영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리지 않게 한다. 우리가 머리가 나쁘거나 감정적으로 부딪히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가 최우선으로 성경 말씀을 왜곡되게 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교세 확장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 건물의 크기, 교인들의 수에 많은 신경을 쓰지 교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회개하여 거듭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마귀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평생의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면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 성경에는 재물을 지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였다. 두번째 밭은 돌짝 밭인데, 그 밭 안에 돌을 기경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핍박이 올 때 넘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지킬 때 어려움이 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한다. 끝까지 지킬 때는 어려움이 오게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넘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밭의 돌을 기경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회개없는 밭은 말씀의 씨가 영생에 이르도록 자라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세번째의 밭은 가시떨기의 밭이다. 말씀은 심겼는데, 가시떨기를 제하지 않고 씨를 심은 것이다. 가시떨기는 빨리 자란다. 재물의...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누가복음 15장 32절의 말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마지막 말씀이다. 동생에 대해서 큰 아들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회개의 말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만이 언급된다. 이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예화로서 유명한 말씀이다. 영접 기도처럼 탕자의 비유가 많이 언급되어진다. 탕자의 비유를 하게 된 이유는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세리와 죄인들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정죄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15장 2절에서『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므로 예수님이 3-4절의 말씀을 하게된다.『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찾으면 이웃과 친구를 불러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여기에는 회개에 대해서 언급된다. 그 다음에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가 8-10절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찾았더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라고 한다. 여기에도 회개가 언급된다. 회개가 무엇인가? 오늘날 회개의 의미가 repent에서 receive로 바뀐 것이다. 돌이키는 것에서 영접으로 바뀌었다. 위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살펴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누가복음 15장 8-10절의 내용인『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 두번째의 비유이다. 첫번째 비유는 백마리의 양 중 한마리를 잃어버려 그 목자가 한마리를 찾으로 나가는 비유이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목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마리를 찾으로 가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번째 비유는 어느 여자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이야기이다.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셔서 여자인 교회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죽어있는) 동전을 찾는 이야기다. 두번째 비유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죽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만으로 가능하다. 이 두가지 비유의 마지막 귀절은 다 똑 같다.『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목자를 잃어버리는 것이 죄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상태가 두번째의 비유에 이르런다. 인간의 영은 어두움 속에서 죽어있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이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사서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세우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마른 뼈들이 붙고 거기에 가죽이 붙고 힘줄이 붙고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일어난 것이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만들어져서 거기에 주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오순절에 교회에 생기가 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깨닫지 못하게 하여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 예수님이『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마가복음 4장 12절 앞 장에는 네가지 밭의 비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길가 밭에 하나님 말씀이 뿌려진 밭은 새가 와서 길 가 위에 있는 씨앗을 쪼아 먹는다. 길가의 새는 마귀라고 했다. 두번째 밭은 돌짝 밭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는 졌는데, 돌이 있어서 씨앗이 깊히 자라지 못해 해가 뜰 때 말라버리는데,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환란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못이기는 이유는 땅 속의 돌을 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세번째 밭은 가시떨기 밭은 비유인데, 하나님 말씀이 뿌려는 졌지만, 가시떨기를 뽑지 않아서 자라지 못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재물의 유혹과 염려를 말한다. 위의 것들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 네번째는 좋은 밭이다. 거기에서만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한 후에 마가복음 4장 12절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하는 이유는 감출 사람에게는 감춘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교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귀절은 회개한 사람만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니골라당을 미워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미워하노라』 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진노하시는 것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있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라고 설교하니까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주가 될 때 그 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말이고 우리가 참 회개가 있을 때 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합되어서 믿음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얻게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주가 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가 주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주인됨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바로 내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예수 믿는다고 외쳐도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삼년 동안 집과 직업을 버리고 베드로가 예수를 따랐다.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삼년 동안 의심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었다.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 삼년을 함께 지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 한 가지가 이해가지 않는 것이다.『나는 이 땅에 죽으러 왔다』는 말씀이다.『나는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께 직접 들었던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다 믿는다고 하지만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가짜 신앙인은 교회생활은 열심히 할지 몰라도 내 안에 예수가 없다면 가짜 신앙인이라는 말이다. 입으로 성경 귀절을 외울 수는 있지만 내 안에 예수가 없다면 구원은 없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안에 있다면 어떤 경우라도 절망은 없다. 정말로 예수가 우리 안에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절망이 올 때 알 수 있게 된다. 예수가 없으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가서 예수를 전하라』는 것이다.『모든 사람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믿음이 온 후로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오늘날에는 주님을 영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죄 사함이 아니라 주님이 예수의 피로 우리를 사는 것이다. 속량이 죄사함이다. 속량은 주님의 것이 된다. 이 말이 29절의 말씀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그리스도의 것이 바로 크리스찬이다. 내가 예수 믿어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세례다. 세례는 예수님이 핏값을 주고 우리를 사신 것이다. 주님이 핏값을 주고 사는 자는 회개하는 자를 말한다. 주님이 사는 자는 자기 생명을 주신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여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못견딘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기 때문이다. 계시된 믿음은 하늘로 부터 온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궁금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 17장 17-18절에서『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절에서『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삭은『웃었다』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웃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름을 이삭이라 지어준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많은...

자기확신과 구원받는 믿음

자기 확신과 구원받는 믿음  예수님이 삼년 동안 베드로와 함께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본 첫날부터 기적의 연속이었다. 베드로도 처음 본 기적이 장모의 열병 치료였다. 삼년 동안 인간으로서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한번은 예수님이 질문을 했다.『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베드로가 말하기를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구원자 메시야』라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삼년 동안 의심한 적이 없었다. 기적을 경험할 수록 더 믿어졌다. 삼년 동안 믿음이 자랐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기적을 많이 보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으로 부터 들어왔는데도 사탄이 그를 넘어 뜨릴려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음이 떨어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웠던 베드로가 사탄이 넘어뜨릴 수 있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어떤가? 베드로가 안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이『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베드로가 돌이킨 후에야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대단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대답이 있다.『아닙니다.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곧 후에 로마군병들에 의해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밤은 매우 추웠고, 예수님은 그 날밤에 고문을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한복음 8장 30-32절에서『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니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대인들은『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자유케되리라 말을 하느냐』라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34-36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아들이 자유케 해야지만 자유가 된다는 말이다. 아들이 죄로부터 사단으로부터 자유케 해야만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말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다. 그런데『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이라는 조건이 있다. 이런 조건이 될 때 참 제자가 되고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이다. 조건은 두가지이다.『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고, 참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안다는 말이다. 이『안다』는 말은 아담이 하와를 안다(동침한다)는 말과 같다. 즉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주인이 되어 나를 자유케 한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주인이 나에서 진리가 주인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로 부터 자유케 될 수 없다. 그저 죄를 자백해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죄의 종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섞은 생각에 잡혀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내 죄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죄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면 죄 용서를 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의 근거는 없다. 다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죄사함은 세례의 결과다.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물에...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재산을 상속해 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로 부터 재산을 상속받아 나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다 날린 아들의 이야기이다. 아들이 재산을 다 날린 다음에 다른 나라의 돼지를 키우는 곳에서 쥐염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았다. 그때 기억난 것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품꾼들은 이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한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더니 아버지는 혼내지도 않고 뛰어가서 입을 맞추고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반응은『나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말하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 그런데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신발을 신기게 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이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요한복음 3장 16절과 함께 사람들이 좋아하는 귀절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는 사람은 세리였다. 모든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께 나왔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수근거렸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드린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다. 탕자가 돌아온 뒤 잔치를 준비하는데, 큰 아들은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고 돌아온 뒤에 보니까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안 것이다. 큰 아들이 잔치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다. 너의 동생이 돌아왔으니 잔치를 한다는 말을 듣게된다. 큰 아들이 노하여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큰...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세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은 일곱개이다. 성령세례에 대해서 쓴 것은 없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에베소서에 언급되고, 모든 서신에는 물 세례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세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구한다.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데, 삶의 현장에서 능력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죽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다. 십자가의 감격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백년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십자가는 완성된 사랑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가르쳐왔다. 사탄의 머리는 성령을 따를 때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부숴버린 것이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감격이 없으므로 성령의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요한계시록처럼 죽임당한 어린양 만을 노래해야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의 능력을 구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십자가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기도 하다. 부활을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 처럼 부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쳐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자아의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어려움이 오면 내 자아의 뜻대로 하는 것을 보게된다. 삶의 어려움이 오면 성경을 보지도 않고 내 뜻을 먼저 생각한다. 이게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기도 하다. 『죽었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죽은 것을 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가 유다서 1장 3-4절에서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구원을 말한다.『단번에 주신 믿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단번에 얻은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것은 구원이 아니라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힘써 싸워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유다서를 쓴 목적은 단번에 주신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힘써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단번에 믿음을 얻어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힘써 싸워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구원이 어렵다고 말하는 자가 오히려 이단시되는 현실이다. 정말 두려운 일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는 것이다. 힘써 싸워야 하는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몇사람 때문이라고 한다.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정해진 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경건치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색욕거리)으로 바꾼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우리 주위에 들어와 있다. 유대서 1장 5절에서는『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다시 생각나게 한 것은 바로 믿음이 단번에 생겼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의 시작, 루터의 95개 반박문 회개을 외쳐야 할 마지막 세대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가 선포한 95개 조항이었다. 1517년 10월에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를 비판하는 그 반박문을 3개 써서 하나는 그가 사역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내에 있는 교회 정문에 붙였고 또 하나는 교황의 직속 수하였던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알베르토에게 보냈으며 세 번째 복사본은 브란덴부르크의 감독에게 보냈다. 당시 교황은 마인츠 성당 출신이었기에 마인츠 대주교는 루터에게 받은 95개 반박문을 로마 교황청으로 즉시 보냈고 교황 레오 10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책임자를 통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던 슈타우피츠에게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의 입장을 철회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 해 말 수많은 진짜 그리스도인의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종교재판소를 주도했던 도미니쿠스 종단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루터에 대한 106개 반박논문이 테첼에 의해 쓰여졌고 1518년 1월에 테첼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쿠스 총회에서 발표하였다. 결국 루터는 1518년 봄 7명의 선제후(先諸候, 라틴어 Princeps Elector의 번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택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 중에  프리드리히(Frederick)의 보호하에 40개 항목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총회에서의 논쟁을 위해 다시 제출하였다. 그 사이 95개 조항을 발표한 지 보름만에 라틴어와 독일어로 전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암흑시대 천년을 주도했던 로마 카톨릭의 거짓된 구원의 교리에 저항(protest, 프로테스트)했던 종교개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때 루터는 겨우 34살이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6년 전에 28살의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이어 신학박사가 되어 29살이 되던 1513년부터 2년동안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4장 18절에서 묻는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그런데, 사도행전에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하니까 삼천명이 주께 돌아왔다는 말을 한다. 왜 이렇게 상반된 듯한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서『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노아 때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8명이라고 했다. 베드로후서 2장 5-8절에는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베드로의 사도행전 설교를 바라보아야 하나, 아니면 베드로 전후서의 설교를 바라보아야 하나? 우리의 인생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이 대세다. 탕자가 돌아 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회개없이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고 했다. 노아는 주님의 사랑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의를 전파한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나라와 의를 전파해야 한다. 의가 없으면 평안함도 없다. 손해를 보더라도 의를 지켜야 한다. 노아 때나 오늘날의 시대나 죄악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담의 가정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형이 동생을 예배로 인하여 죽이는 사건이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을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기록한 내용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성령의 능력을 입게되면 저절로 회개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는데, 성령의 역사가 이사야서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이렇게 제목에서 보듯이 끝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간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런데도 28장에 와서는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이방인에게로 가노라』 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4장 1-10절까지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11절에서『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2절에서는『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네가지 밭에서 길가에 뿌린 씨는 하나님 말씀을 새가 쪼아먹는 것이고 그 새는 마귀이다. 성경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마귀의 방해 때문이다. 두번째는 돌짝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심었지만 그 흙속에 돌이 있는 것을 먼저 기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의 싹이 자랐지만 햇빛이 나면 말라버린다. 말씀으로 인한 핍박과 어려움이 올 때,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세번째는 가시떨기 밭이다. 하나님 말씀이 심겨졌지만 가시떨기(탐심) 때문에 자라지 못한다는 말이다. 탐심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세가지 유형의 밭은 구원받지 못하는 밭이다. 마지막 밭은 좋은 밭이다. 인내로 결실하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이 심겨졌을 때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말이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 결실하게 된다. 이 밭이 구원의 밭이다. 저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저희...

예수와 매스미디어

예수와 매스 미디어 스타탄생. 옛 영화제목이다. 아무것도 아닌 시골 여인이 유명한 가수가 되는 이야기. 그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극장(Theater)들을 찾아가 대중을 만나야 했다. 그녀를 스타가 되게 만든 것은 그녀의 노래와 대중을 만나게 한 광장과 극장이었다. 그 극장은 헬라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고고학적으로 헬라 문화를 이루는 하드웨어는 극장, 광장, 도서관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모였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재와 만나기 위해 극장과 광장에 모여졌다. 오늘날엔 그렇게 대중들이 공감하게 하는 하드웨어를 매스미디어(Mass Media)라고 하는데, 극장과 광장에서 시작된 미디어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중이라고 번역되는 Mass의 성경적인 개념은 예수 앞에 모여들었던 허다한 무리들이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누가 5:1,2) 예수 앞에 무리들이 모여들었는데 예수는 그 대중을 주목하지 않고 두 배를 보셨다. 또 하나의 본문도 마찬가지인데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누가12:1) 싸이의 공연처럼 무리 수만 명이 서로 밟힐 만큼 모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중에게 주목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대중(매스, Mass)은 예수께 집중했지만, 예수는 소수에게 집중하셨다. 정치는 다수의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와 친할 수 밖에 없다. 정치가와 선지자는 다 사람들에게 의를 말하는데 정치가가 말하는 의는 다수가 공감하는 사람들의 의다. 그 의는 공의(公義)가 아니라 공동의 이익(公益)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주목하는 힘없는 소수에게 나타나는 불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의는 손해과 고통에 대한 정의(正義, Justice)이다. 세상의 미디어는 매스 미디어이다. ...

부흥을 위한 소식

부흥을 위한  소식  미국의 부흥을 섬겼던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찰스 G. 피니  (Charles Finney) 그리고 잠자던 영국 교회를 깨웠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웨일즈 부흥의 주역 이반 로버츠(Evan Roberts)는 당시에 부흥보다 먼저 비방과 핍박이 찾아 왔었다. 요나단 에드워즈의 생애를 보면 그가 교회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가 설교를 마친 후 늘 돌과 계란이 날아오고 그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체포되었고 매맞아야 했다. 부흥으로 시작된 오순절교단이 나올 때까지. 이반 로버츠는 십자가만을 설교했는데도 당시의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부흥의 전조로 성령의 기쁨과 희락으로 인한 사람들의 인정과 칭송을 추구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값으로 주시려는 성령의 역사도 예수님이 주시려는 성령의 역사보다는 사람들이 호응할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에는 치유가 일어나서 기쁘고 감격스러운 예배가 늘어나는데도 그 교회 근처의 세상에서는 죄로부터의 각성과 진지한 회심이 일어나는 일이 적은 것 같다.  예배에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서 예배자들이 은사들을 누리고 기뻐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기쁨에 비해서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로부터 돌이킴은 있으나 이웃을 위해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는 자아로부터의 돌이킴은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베들레헴 들녁에서 밤 중에 양치던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모든 백성에게 미칠 부흥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12) 자신의 삶과 부흥이 아직은 직접 관계가 없는 그들에게는 큰 기쁨의 좋은 ...

이 시대를 향한 주의 뜻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사단은 하나님께 그에 대하여 참소하기를 욥은 복을 주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신 복을 따른 거라는 것이다.  그 참소로 인해 욥에게 임한 고난은 혹독했다. 자녀들은 죽었고 비즈니스는 망했다. 그런데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다.(1:22)  아내의 저주스런 말에도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2:10) 그 후 욥의 세 친구가 와서 그를 보고 7일간을 슬피 울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물은 욥을 무너뜨렸다.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3:1) 아내의 혹독한 말에도 넘어지지 않았던 욥이 친구들의 눈물에 넘어졌다.  그 친구들의 눈물은 순수했고 욥을 향한 사랑이겠으나,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신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었고 순전하지 못했다.  진리가 결여된 눈물의 사랑 앞에  욥은 스스로 무너졌다. 이런 진리가 결여된 사랑을 주의해야 한다. 그 친구들의 신앙은  사단이 참소했던 바로 그 신학이었다. 욥이 하나님을 따르는 이유는 복을 주신 주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복 때문이라는 참소였는데,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환경을 가지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해석한다.  데만사람 엘리바스는 말한다.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7)  순수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그들의 눈물이 마르면서 그들의 입에서는 정죄와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위로는 곧 상처를 주는 비판으로 바뀌게 되어있다. 불순종한 천사가 사단이 되었듯이. 그 친구들의 신학은 동화책에 나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수준이었다. 선한 사람은 결국 잘되고 악한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된다는 어린이 동화책. 그런데 세상의 모순과 혼돈을 경험하면서 어른들은 그 동화책을 ...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갈 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영광의 주님이었다.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면서 주님은 말씀하셨다.『사울아 넌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사울이『주여 누구십니까?』하니 주님은『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답하셨다. 바울은 이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되었다. 그런데 그게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삼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눈은 소경이 되었다. 삼일 뒤에 주님이 아나니아를 보내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사울아 왜 주저하느냐 너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말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회개고 세례이다. 삼일 동안 바울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못박히신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이다. 바울 서신은 모두 다 교회에 편지한 것인데, 그래서 회개 라는 단어가 복음서보다 확 줄어든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는 핍박받던 자들이었다. 핍박 속에서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는 것을 듣고 따른 자들이니 회개라는 단어가 안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회개라는 말이 나온다.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첫째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두번째 회개하는 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공로 때문에 믿는 자에게 믿음이 주어진다.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연합되기 위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전해지는 소식은 회개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내가 있다. 나를 믿으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이다. 사도행전 26장 20절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은 다메섹에서 정오의 태양 빛 보다 밝은 빛이 비치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된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바울이 추구한 것은 또 다른 음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 천지창조보다 위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단에게 넘겨진 창조된 것을 새롭게 하는 시작이 십자가의 죽죽으심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그 결과이다. 부활과 승천은 정상으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원래 죽을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의 부활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한 어린양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교회에서는 부활을 더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인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절대 죽어서는 안될 분인데 죽으신 것이다. 바울이 추구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부활을 설명하면서도 바울은『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그리고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죽으심을 본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날마다 죽노라』를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회개하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으심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미혹과 타락이 오게된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자는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고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사람이다.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 만을 두려워한다. 바울은 말한다.『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예수님이 십자가에서『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에게는 이 온전한 연합이 안되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 만이『다 이루었다』라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 산상수훈을 하던 산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나셔서『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예배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에 대해서말씀하고 있다. 예배자로 사는 것은 구약시대에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제자를 삼으라』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예배에 머무르지 말고 뛰어넘어서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와 봉사와 각종 교회 일을 하는 것에서 밖으로 나가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시작일 뿐이며, 주체가 아닌 것이다. 제자는 구원의 필수이다. 제자가 되지않고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예배에 대해서 구약에서는『너희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오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땅으로 가셨다. 그래서 예수님이『너희도 가라』라고 하신 것이다. 가야만 제자가 된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문제만 해결하려고 애쓰다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이기심의 결과이다.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라고 하셨는데, 모든 믿는 자들이 이렇게 하라는데, 오늘날에는 목사들만 세례를 주는 것으로 교권으로 한정해 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에 갔을 때 빌립 집사가 세례를 주었고, 에티오피아 내시와 마술쟁이 시몬에게도 빌립 집사가 세례를 준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주님은 아무에게나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자에게 함께 하신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진리를 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13장23-24절에서『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도 언급된다.『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온갖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한 것이며,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질문하니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며, 나중에 들어가고 싶어도 안받아 준다는 말씀이다. 들어가기를 구하는 사람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열처녀 비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5절에서는『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열처녀는 모두 다 같은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등불이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등불을 킨 것은 같지만 내적으로 다른 기름통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이다. 마태복음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는 좁은 문 앞에 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찾는 이가 많은, 넓은 문에 대해서는 아예 말씀하지 않고 있다. 열처녀와 같이 좁은 문으로만 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좁은 문으로 갔지만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은 사람들이다. 힘쓰지 않은 동안에 문이 닫혀버렸다. 지금 좁은 문 앞에 있는데, 예수님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하셨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해야지 사랑의 하나님이 맞으신가? 하나님은 심판자의 모습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구원자와 심판자의 모습은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다. 성경 전체를 두고 보면 신앙생활의 본질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생명 길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회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3장 23-24절에서는『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했는데, 마태복음과 같은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다. 내가 쌓은 믿음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 믿음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계시이고 선물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대에  대부분의 교회는 회개하지 않은 인간들을 교회에 오게 만들려고 하는 모습이다. 교회 다닌다고 모든 자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누가복음 13장 25절에는『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말하는 성경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믿음의 일을 행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반드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와 함께 죽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회개는 세상죄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죄를 짓게 만든 옛사람을 회개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떠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를 하는 자는 하나님이 세상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거듭난 자가 아니며, 예수님의 말씀은『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다. ...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말씀이란 로고스가 아니라 웨마라는 말이다. 이 말씀이 육체 속의 깊은 심령으로 심어질 때 거듭난다는 말이다. 베드로는『그러므로』라고 하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인생에 있어서 성공과 영화는 언젠가는 시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오직 주의 말씀(웨마)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세례요한이 전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인용한 이사야서를 보면 40장 6-8절 에서 베드로가 말한『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만 외친 것이 아니라 이 광야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함께 외친 것이다. 이사야서 40장은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한 말씀이다. 마태복음 5장 3-5절의 산상수훈은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구원에 대한 영적인 단계이다. 삶의 과정에서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 말이 바로 4절에서 말하는『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애통이라는 말이 슬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죄를 애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 죄의 결과를 아파할 뿐이지 죄의 원인을 아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다윗은 죄의 원인을 아파했을 때 회개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죄의 결과만을 아파했던 것이다. 병의 결과로 나타난 것만 보고 치유할 것이 아니라 병이 나타난 원인을 치유해야 병이 완전히 낫듯이 죄의 원인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사람들...

보복의 날

보복의 날 (the day of the vengeance) 예수께서 처음 나사렛의 고향 회당에 가셨을때 회당장으로부터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받았는데,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고 하시면서 신원의 날을 읽지 않으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7~19) 원래 이사야서에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61:2) 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 (the year of Jubilee)’만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보복의 날(the day of the vengeance)”은 읽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보복의 날’은 재림하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원수갚는 의로우신 일이 계시록에 기록된 스토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못박는 로마 병정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함께 사형당하는 강도를 구원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스데반 집사도 돌맞아 죽는 때까지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했다. 우리에게도 생을 다할 때까지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구원할 사명 뿐이다. 그런데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계6:9,10)라고 기도한다.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복수를 간구한다. 천사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